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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5. 2019

정동길

등록기준지 유감

정동(貞洞) 길


사람이 살다보면 평생토록 같이 가는 것도 있고, 인생길 어디쯤에선가 슬쩍 내려두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사람이든 비장(秘藏)하는 애장품이든 공개할 수 있는 게 있고 공개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어떤 것은 가족에게도 영원히 비밀인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존재합니다. 가급적이면 '공개' 쪽으로 정리해서 모아두라는 입장이 있고 끝까지 비공개를 유지하라는 입장이 있습니다. 저는 최대한 '공개' 쪽 입장을 견지하되 죽을 때까지 입밖에 내지 않을 것을 몇 개는 꼭 가지고 있겠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만은 '나만 보기'로 끝까지 남아 있어야 삶의 허무에 조금이라도 저항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로지 신과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한두 개는 있어야 죽더라도 '짹 하고' 한 마디 지르고 죽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정말이지 인생이란 너무 가볍고 초라하고 속된 것이라는 느낌을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제게도 평생 같이 가는 게 있고(공개든 비공개든), 도중(途中)에 하릴없이 내려놓은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정동(貞洞)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특별하게도 도중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챙긴 것에 속합니다. '공개' 쪽 이야기니까 그것에 얽힌 사연부터 말하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제가 그 길을 제 발로 처음 밟은 게 지금부터 근 50년 전의 일입니다. 아득한 옛날입니다. 고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때였습니다. ‘도적처럼’, 그리고 ‘하늘에서 내린 두레박처럼’, 학업을 계속 잇게해 준 온 종친회 장학금을 받기 위해 저는 12시간 내내 기차를 타야 했습니다. 남해 바다를 면한 작은 어촌이었던 마산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시간은 그렇게 길었습니다. 새벽에 도착한 서울역 근처 다방에서 계란 노른자를 얹어주는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시고 물어물어 종친회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덕수궁을 찾아서 그 옆 돌담길을 따라서 쭈욱 가다 보면 큰 신작로가 나오는데 그 길을 건너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남대문을 지나 그저 크게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그럴듯한 궁궐문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여기거니 하고 궁궐 담장을 끼고 올라갔습니다. 과연 그 길 끝에서 종친회 건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건물주인이었던 종친회장님은 ‘니가 첫 번째다’라며 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고등학교 3년 동안의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주거비까지 마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별 수 없이 그런 식일 것입니다. 그 한 달 전만해도 저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어딘가에서 하우스보이라도 하면서 진학 비용을 마련해야 되는 신세였습니다. 형편 상 형과 나, 둘 중의 하나는 학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형은 1년만 더 다니면 졸업이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양보해야 했습니다. 우울했지만 달리 선택할 경우의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운명’을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낭인 생활을 설계(?)하면서 기분전환 삼아 목사님 댁에 가서 헌 신문지들을 얻어와 방 도배를 했습니다(교회에서 더부살이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기분전환용으로 시공했던 그 도배행사가 제 팔자를 고쳤습니다. 도배지로 쓴 며칠 전 신문지에서 종친회의 장학생 모집 광고를 발견한 것입니다. 언뜻 봐서는 도저히 캡처할 수 없었던 한자투성이의 암호 문자를 형이 용케 수신(受信)해서 끝내 그 행운을 동생에게 선물했습니다. 흔히 종친회의 이름은 그 성씨의 유래와 관련된 고사(故事)를 원용해서 은유적으로나 환유적으로 작명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우회적인 표현은 문자 속이 깊지 않아 그 고사를 모르는 타성바지들에게는 풀기 어려운 암호와 같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었던 형이 어떻게 그런 ‘비밀스런 가문의 역사’를 용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모집 광고가 전국에 있는 ‘가난한 후손’들에게 전하는 종친회의 ‘은혜의 말씀’이라는 걸 형이 읽어냈습니다. 형이 그 암호를 해독한 덕분에 제 삶은 탄탄대로로(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그 이후로 제 인생은 한 번도 좌절된 적이 어뵤었습니다) 그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그 ‘탄탄대로’와 함께 하는 첫 번 째 공간 이미지가 바로 정동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저는 앞으로는 제 인생이 그렇게(지금처럼!) 암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의 정동길이 제대로 된 그림으로 제 눈에 들어왔을 리가 없습니다. 여명(黎明)의 낯선 땅,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들, 말로만 듣던 서울(워낙 어린 시절에 살았던 터라 서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던 구사일생, 그리고 여전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하는 불안한 내 신세. 그런 것들이 주변의 풍경을 제대로 주워담을 수 있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앞만 보고 걸었을 뿐입니다. 길이 목적지에 이르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무엇이 되는 '인생에 대한 과장된 느낌'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 길이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나중에 중구로 이관. 현재는 정동길 3)에 나오는 그 '정동길'이라는 것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저 서소문 몇 번지 **빌딩(종친회 사무실 주소)으로 통하는 골목길로만 알았습니다.

한편, 저의 최초 등록지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는 모종의 이중간첩과 같은 종종 이율배반적 느낌을 주는 애매한 기호체였습니다. 그 것은 우리 가족의 본적지 주소입니다. 보통 본적지라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곳’이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게 그 주소가 ‘긍지의 표상’이 되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동 22번지’는 그런 원관념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호였습니다. 그냥 그 주소에 우리의 가짜 역사가 올라탄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남은 ‘텅빈 시니피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용 없는 기호가 때로는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제게 꽤나 위세를 부리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최초의 ‘시니피앙 등록’이라는 족쇄를 무기로 시시때대로 저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서류 작성할 일이 있을 때마다 본적지 기재란에 매번 그것을 적어야 했는데(얼마나 많이 적었던가!), 그때마다 저는 꼭 ‘오페라의 유령’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듣기는 좋지만 모종의 상처를 환기시키는 기표였습니다. 피난민, 가난, 정체불명, 소외, 불안...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와 함께 하는 그것들은 항상 저를 근원결락강박으로 몰고 갔습니다. 거기다가 그 주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라디오나 TV를 통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때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지금은 경향신문사 주소지만 그때는 문화방송 주소였습니다. ‘보내주실 곳’ 등의 명목으로 또박또박 낭독되는 그것과 거의 매일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것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소설의 형식으로 그 길에 얽힌 비사를 적은 것이 있어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정동은 내겐 좀 특별한 곳이었다. 이를테면, 정동길은 한 때 내 고향이던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때 내 고향의 이미지를 구성했던 곳이다. 유년기 때는 막연히 ‘본적’이라는 것이 고향을 뜻하는 것이라 여겼고, 사춘기 때는 종친회 장학금으로 나를 묶어둔 곳이었다. 그런 것을 두고 누구는, 원초적 억압에서 비롯된 최초의 시니피앙 등록(signifiant registration)이라고 했던가? 어릴 때 생성된 핵심적 기표들은 평생 동안 주체를 지휘 감독 간섭한다고 라캉은 말했다. 그래서 정동길은 지금도 나에게 만만치 않은 간섭을 행한다. 아버지가 거기서 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이남에서의 본적을 만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무렵의 일에 대해선 오직 어머니의 간접진술밖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아침에 방 밖으로 나오니 옆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다 들리더라. 홀애비 혼자 사는 집에 웬 색시냐는 거지. 내 그때처럼 황망할 때가 다시없었단다.”
피난지 제주도에서 서울로, 살 근거지를 마련하겠다고 올라간 아버지는 해가 넘도록 편지 한통 없이 감감 무소식이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혼자 버티던 어머니는 아이들을 이웃에 맡기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만 해도 제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남편 찾아 삼만리’였다. 사흘 밤낮으로 물어물어 찾아간 서울 거리가 또 만만하지를 않았다. 전쟁이 막 끝난 직후라 아직 서른도 채 안 된 젊은 여자 혼자서 다니기에는 여러모로 벅찬 거리였다. 어머니는 온 서울을 헤매다 결국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혼자 몸으로 단칸방을 얻어 살고 있던 작은집 시삼촌(할아버지의 배다른 동생. 아버지와 갑장이었다)을 운 좋게 만나 하룻밤 신세를 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두 사람이 함께 서울을 뒤져 거지꼴로 노숙을 일삼던 아버지를 만나서 같이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낳았다.
어쩌면, 아버지가 부랑자의 모습으로, 그 쓸쓸하고 막연한 정동길에서, 1년여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버틴 모진 세월의 그림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나에게로 유입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면, 정동길에서 느끼는 내 감회는 좀더 연원이 깊다. 그것은 내 경험의 기원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는 것이다. 길바닥에 그냥 내려놓은 것치고는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졸작, 「물텀벙 대동강」중에서)


위의 소회는 소시적에 제게 소박을 맞았던 정동길이 노년에 가로늦게 등장해 마치 본처 행세를 하는 듯한 기분이 반영된 것이라 어느 정도는 감상적인 어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허세가 빠진 뒤의 허전한 물색(物色)이 완연하다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형의 몰락이 가시화된 후 저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오직 제가 살 길이라는, 근거 없는, 그러나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는 아주 냉혹하게 그 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가 호주로 되어 있는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버렸습니다. 본적을 신접살림 주소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그 주소를 잊고 살아왔습니다(몇 년전에 그 근처에서 모종의 국가고시 출제에 참여하면서도 별다른 감회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 22번지’를 아예 내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아, 한 번 살가운 정을 느낀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동화은행이었던가, 이북5도민들에게 특혜가 되는 주식을 배당한다는 말이 있어서 그쪽으로 본적(원적) 조회를 한 번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아마 얼핏 그 주소에서 ‘혈육의 정’을 잠시나마 느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오랜만에 공문서를 한 번 작성할 일이 있었습니다. 본적지 적는 난이 공식 서류에 없어졌다는 말은 오래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생소한 ‘등록 기준지’라는 게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뜻을 몰라 우왕좌왕 했었는데(그래서 저는 어이없게도 거기다 직장 주소를 썼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옛날의 본적지 적는 곳이었습니다. 등록 기준지라니, 결국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자신을 최초로 붙들어 매었던 공간에 대해, 그 공간에 부착되어 있는 역사적 기록들에 대해 쓰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그 ‘등록 기준지’라는 말이 결정타였던 것 같습니다. 오락가락하던 제 마음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정동길이 대놓고 제 인생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동길 답사도 우정 다녀오게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처음 등록된 곳을 다시 되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노골적으로 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동길’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쓰는 것도 결국은 그 억누를 수 없는 ‘최초 등록지의 추억’을 달래기 위한 한 마디 궁여지책이라 할 것입니다.

추신: 달포 전에 '등록 기준지'를 기어이 '서울시 중구 정동길 3'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동안 호주 제도가 없어져 등록기준지 변경이 개인별 사항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식구 중에는 저 혼자만 원상회복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잘 된 것 같습니다. 집사람과 아이들과는 1도 관계가 없는 정동길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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