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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4. 2019

비슷하거나 가까이 있는

생각 줄이기

비슷하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이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유추나 예단을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비교, 비유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 기호학의 입장입니다. 기호학에서 동일화, 범주화, 은유, 환유 같은 개념들을 중시하는 것도 그 까닭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본능이 아니라 '생각'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기호학자들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생각'의 중요성에 공감하면서, 그것의 용불용(用不用)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비슷하거나(은유) 가까이 있는 것(환유)는 결국 진짜 실체는 아니라는 반기호학적인 생각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자네는 생각이 너무 많아!", 생각깨나 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질책성 충고를 들어봤을 겁니다. 사심이 있다, 걱정이 많다, 자기중심적이다, 불만분자다…. 대강은 그런 의미로 전달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비슷한 말을 친하게 지내던 복학생 선배에게서 들었습니다. 그 나이 또래에선 무지 박학다식했던 그 선배의 집에 놀러 가서 준비도 없이 그런 충고성 비판을 받고 어린 마음에 사흘 밤낮을 '생각' 속에서 헤매야만 했습니다. 훗날 그 기분을 '매춘'(하종오·1979)이라는 시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못난 놈, 꽃이 지는구나!'였습니다. 저 스스로 참 못나 보였습니다. 그 뒤로는 '생각'을 가급적 남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아마 대학 졸업반 때였을 겁니다. 하숙집 동숙인이었던 학사편입생 선배가 하루는 저를 품평했습니다. 몇 달 같이 지내본 소감이었는데 그 요점은 "정치적인 인물들은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였습니다. 제가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었는데 그것을 '정치적'이라는 개념으로 범주화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또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평가 역시 "너는 생각이 많다"라고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욕심)은 많은데 호시탐탐 결정적인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음흉한 자라는 뜻이었습니다. 참 어려운 게 사람살이였습니다. 본바탕이 못난 자는 어떻게 해도 남의 애정을 거저 얻을 수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보통 '생각'에 매여 사는 일이 줄어듭니다. 기력이 감소하는 것에 비례해서 '생각'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집니다. 비교, 비유의 대상이 많이 줄어듭니다. 사람들은 은유나 환유를 써서 생각을 합니다. 비슷하거나(은유) 가까이 있는(환유) '제3의 물체나 관념'(보조관념)을 끌어다가 자신의 감정에 색을 입힙니다. 물론 그런 '색칠하기'는 임의적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적 조건이 개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아들은 그런 '색칠하기'를 체계적인 개념화라고 여깁니다. 스스로 하는 판단이 마땅하고 옳은 '해석'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 자부심을 버리지 못해 매일 매일 '생각'으로 일관합니다. 

사람이 어차피 '생각'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근사록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확연이대공 물래이순응(擴然而大公 物來而順應·마음이 확 트여 크게 공정하여 사물이 오면 순순히 응한다)'뿐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전체(帶電體)로 사는 것만이 '비슷하거나 가까이 있는' 것들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아닐까요?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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