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이야기
가재미 알
아침밥상에 구운 가재미가 올라왔다. 제법 통통하고 크다(은혜를 베푸신 아내의 절친 루시아 자매님과 그 부군께 감사). 어제 저녁에는 영덕에서 손수 쪄서 공수한 다리 살 꽉 찬 홍게를 먹었는데(은혜를 베푸신 내 절친인 K교수와 영덕 출신 사모님께 감사) 평생 살면서 이와 같은 호사를 누린 적이 처음이다. 모두 (내겐 없는) 친화력을 지닌 배우자를 둔 덕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구운 가재미를 먹다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밥상 위에 올라온 가재미 중 한 마리는 암놈이었는데 그놈(그녀)이 품고 있는 알이 가관이었다. 거의 몸의 절반이 알로 가득차 있었다. 한 겹 얇은 껍질(피부) 밑에 이런 장대한 '생명의 기획'이 숨어있다는 것이 놀라왔다. 밤새 비몽사몽으로 까칠했던 맨입이 그 ‘절반’의 거룩한 모정을 맞이해서 순식간에 황홀경으로 젖어든다. 그와 함께 어제 저녁에 TV에서 본 ‘핵폐기물’ 이야기가 불쑥 떠올랐다. 가재미알과는 너무 대조적인 그런 '반생명적 기획'이 벌어진다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왜 우리는 가재미 한 마리에도 못미치는 인간들인가? 심하게 자괴감이 든다. 몸의 절반을 후생(後生)을 위해 바치는 이 식탁 위의 미물(微物)보다도 못한 게 인간이다. 10만년이 지나야(계산은 되지만 그 세월을 살아본 자는 없다) 독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여기저기 후손들의 땅에 파묻고 있는 인간이 미욱하다 못해 불쌍하기 그지없다. 10만년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가 그만큼 되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 ‘계산’에 우리 후생을 맡긴다. 정말이지 “꽃이 지는구나, 못난 놈”(하종오 시 <매춘>)이다. 도대체 시간 관념이 없다. 전래동화에도 시간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그렇게 무지막지 하지는 않다. 내 생각에 그 10만년이라는 시간은 ‘무지의 시간’이다.
전래동화에는 지명이나 시간, 등장인물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어느 시골 마을에”, “산속 깊은 곳에”라는 식으로 장소 설명이 아주 간략하다. 시간에 대해서는 가장 애매하다. 때가 어느 시절인지 연대가 불분명하고 대부분 ‘과거에 있었던 아주 먼 옛날’이란 과거형에 대한 명시만 있을 뿐이다. 다만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라는 전제조건이 있거나 낮밤에 대한 시점제시만 있다. …<중략>…
전설에서 민담으로, 다시 동화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없어진 것이 바로 이런 현실적인 리얼리티의 족쇄를 푸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겨놓은 것은 이야기의 갈등구조와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직업이나 신분, 가족 내에서의 위치다.
또 하나의 이유는 외부 현실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세계를 반영하기 위해서다. 애매한 호칭을 써서 관계를 표현해야 쉽게 내적 표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이는 동화를 듣거나 보면서 동화의 등장인물이나 줄거리 중의 특정 부분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자기 주변의 실제인물이나 그 사람과의 관계와 동일시하게 된다. 사람의 ‘자아(自我)’ 내지는 ‘자기(自己)’에 대한 개념은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들의 이미지가 어느새 내 마음의 한 조각을 구성하면서 형성된다. [하지현, 『전래동화 속의 비밀코드』(살림,2009.3쇄), 38~40쪽]
전래동화는 비유컨대 우리 조상들이 남긴 ‘가재미 알’들이다. 우리 후생들을 위한 자상한 배려가 짙게 배여 있다. 읽는 자(듣는 자) 스스로 자기를 발견하기 애쓰도록 일부러 어둔하게 말한다. 애써(득의만만, 의기양양) 취득한 교훈이기에 더욱 애정이 간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화법에는 사랑이 녹아들어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삶의 터전인 모성의 대지, 이 지구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 흫러넘친다. 계산에 밝은 현세의 인간들처럼 ‘10만년’이라는 터무니없는 시간 같은 것은 그들의 화법에 없다. 그건 ‘알’을 기르는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의 절반을 떼어내 주는 가재미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재미 한 마리가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