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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3. 2019

접어서 두드리고 두드려야

몸과 마음

접어서 두드리고 두드려야


우리가 특별한 공부 없이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인간은 몸과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 둘은 하나이지만 때로 전혀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구별없이 하나로 설명하는 쪽도 있고(생물학적 인간관) 마음이 몸의 주인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습니다(불가, 유가적 인간관). 저는 마음도 몸의 일부라고 보는 쪽입니다. 마음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도(武道)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몸의 가치와 역할에 좀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 본격적으로 ‘몸’을 굴리는 일에 몰두하고부터는 아예 그렇게 생각이 고정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심신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몸이 마음으로, 마음이 몸으로 자신의 존재방식이나 상태를 파송(派送)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상호작용이 가장 민감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인간의 뇌라고도 말합니다. 저는 어떤 경우라도 몸 안에 마음(정신)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독단적이고도 무식한 생각을 해 봅니다. “몸 공부(활동) 없는 자들의 마음 공부(지식)는 모두 허랑된 것이다”라고요. 책상물림으로만 안 것은 결국은 ‘주화입마(走火入魔)’로 귀착되고 만다는 거지요.* (주석)


무슨 용심에서 그런 염이 불쑥불쑥 드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반드시 ‘발산(發散)’시켜서 소진해야 할 것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제 경험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어쨌든 저는 몸의 존재 양태 중의 하나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식 없이 자칫 멋모르고 ‘정신주의’ 하나로 나가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가 십상이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그렇게 한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람을 여럿 봤습니다. 몸을 제대로 단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의 고공행진을 하던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추락하는 걸 종종 보아 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몸에 대한 마음의 투쟁의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수신(修身)은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아닌 겁니다. 그것은 몸 공부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았던 옛 성현들의 직설법이었던 것입니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며 토대이다. 마음은 몸의 한 기능이며 표현이다. 몸은 우리 마음이 근거하는 거처이다(주자는 <인간의 본성은 도의 형체이며, 마음이란 본성의 집이고, 몸이란 마음의 거처이며, 사물은 몸이 타고 다니는 배와 수레다(故康節云 : 性者, 道之形體; 心者, 性之郛郭; 身者, 心之區宇; 物者, 身之舟車)>(『朱子語類』 권1, 3쪽)라는 소강절의 말이 매우 좋다고 하였다). 따라서 마음은 몸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즉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어떤 현상도 몸 혹은 기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자는 우리 몸과 마음의 관계를 초와 촛불의 관계로 설명한다. 초가 없이는 촛불이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각하고 인식하는 우리 마음의 작용은 몸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질문 : 지각은 마음의 영명함이 본래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기의 작용입니까?
주자 대답 : 단지 기의 작용만이라고 할 수 없으니, 먼저 지각의 이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치가 아직 지각되기 전에 기가 모여서 어떤 형태를 이루면 이치가 기와 함께 작용하여 지각할 수 있게 된다. 비유컨대 저 촛불에서 기름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불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朱子語類』 권1)
한편 마음은 몸의 주인으로서 몸을 주재한다. 모든 행위에서 마음은 그것을 주재하며 이런 점에서 마음은 우리 몸을 부리는 주재자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우리 마음이 가 있지 않으면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며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몸과 마음은 상호 연관된 일체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마음은 몸에 나타난다. 따라서 수양의 내용도 몸과 태도에 나타나야 한다. 또 몸을 먼저 바로 함으로써 마음을 바로 할 수 있다. 유가에서 개인 수양을 <수심(修心)>이라 하지 않고 <수신(修身)>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입장은 고대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예기』와 『논어』에는 덕 있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많다. 가령 <수신>의 지침으로서 『예기』에 거론된 군자의 모습을 보자.
“군자의 모습은 여유 있고 한가로워야 한다. 높은 사람을 볼 때는 단정하고 삼가야 한다. 발의 모양은 무겁고, 손의 모습은 공손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하고, 입의 모습은 조용하고, 목소리는 고요하며, 머리 모습은 곧게, 기상은 엄숙하고, 서 있는 모습은 덕스럽고, 안색은 엄숙하고, 앉은 모습은 시동(尸童) 같아야 한다.”
유가에서 특히 인간의 행동거지를 세밀한 곳에까지 주목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불가분의 일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생각은 움직임이 숨어있는 것이고 행위는 움직임이 드러난 것이다. 생각은 안에서 움직이고 행위는 밖에서 움직인다.>(『近思錄』권5) [김수중, 「유가의 인간관」, 『인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마음이 몸의 주인으로서 몸을 주재한다는 주자의 말씀에 백프로 다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전혀 마음의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들을 만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수심(修心)’이 아니라 ‘수신(修身)’이어야 하는 이치를 밝히는 대목이 특히 그렇습니다. 유가에서 개인 수양을 <수심(修心)>이라 하지 않고 <수신(修身)>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몸과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 마음은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는 깨침에 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몸 공부, 수신’에 대한 요구가 왜 정당한 것인지는 요즘의 신문 정치면이나 사회면을 볼 때마다, 그 어떤 인간성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떠나서, 절로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전투구(泥田鬪狗)와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따로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야수적 본성(本性)이 인간에게는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선택된 생명으로서의 투쟁 본능’이나, ‘생존을 위해 타고난 경쟁심과 공격성’ 같은 것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교육이나 교양으로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몸의 논리와 윤리’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 그것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인간은 그것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활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런 ‘몸의 논리와 윤리’에 간헐적으로 저항하는 그 무엇을 부단히 행하는 일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는 ‘믿음’을 요구하는 불패의 환상을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몸으로는 내 몸의 운동력에 대한 내 의지의 부단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일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쇠와 같습니다. 접어서 두드리고 두드려야 정련됩니다. 날 때부터 강철인 쇠는 없습니다. 불순물 없이 강하고 질긴 쇠를 만들려면 스스로 부단히 접고 두드려야 합니다. 불패의 환상에 대한 믿음, 그 부단한 반성적 성찰뿐만이 아닙니다. 부단히 몸도 움직여야 합니다. 몸이 예(藝)를 얻어서 예(禮)를 지향하도록 피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스스로 다시 기어올라 와야 합니다. 우리가 도복(道服)을 입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몸 공부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수신(修身)’ 없는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닙니다. 활동이든 사업이든, 진정한 사이후이(死而後已, 죽은 뒤에야 그만둠)의 정신으로 ‘수신(修身)’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짭니다. 제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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