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과 오
붉은 까마귀(赤烏)
연암만큼 글쓰기에 관심을 가졌던 이도 드물 듯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지에 대해 궁리를 많이 했습니다. 글쓰기도 몸기술의 일종인지라 말로 설명할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겠지요. 말로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연암의 ‘붉은 까마귀(赤烏)’ 이야기가 아주 좋은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자기를 뛰어넘는 인식론적인 전환을 강조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연암은 ‘약(約)과 오(悟)의 경지’를 강조합니다. 객관적, 포괄적인 독서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면 글쓰기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경험담을 펼칩니다. 내 편협한 주관, 선입견,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한 순간에 크게 깨치는 경지를 득하는 게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설흔. 박연찬)라는 책에서 그 대목을 한 번 읽어봅니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빛이 번지는가 싶더니 다시 석록(石綠)빛이 번지기도 하고,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에 어른거리다가 다시 비취색으로 빛난다. 그렇다면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테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터이다. 그 새는 본래 제 빛깔을 정하지 않았거늘, 내가 눈으로 보고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 먼저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다고 단정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한정 지으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검은빛 안에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 빛이 다 들어 있는 줄을 누가 알겠는가....<『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설흔. 박연찬)>
연암으로부터 ‘붉은 까마귀(赤烏)’에 대해서 답안을 제출하라는 문제를 받고 전전긍긍하던 제자가, 막다른 길에서, 우연히 찾아온 정서적 충격에 힘입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획득하는 순간에 대한 묘사입니다. 눈앞에 나타난 묘령의 여인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 일순 심리적 공황상태(모든 편견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를 겪으면서 ‘인식의 색안경’을 벗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약관의 제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를 대면하는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붉은 까마귀가 그녀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정신이 갑자기 몽롱해 지며, 얼굴이 불 같이 뜨거워지는 순간, 제자는 문득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거지요. 하늘을 나는 까마귀는 검은 것만은 아니었던 거지요. 현란한 빛의 총합이 본디 검은 색인 법, 마음 속의 검은 까마귀에 사로잡혀 눈앞의 붉은 까마귀를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는 겁니다. 스승은 제자의 깨우침을 격려하고 그 의미를 가르칩니다.
....“네가 스스로 약(約)과 오(悟)의 이치를 깨달았구나.”
“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네가 이리저리 걸으며 까마귀를 본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럴 때 비로소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을 일컬어 약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네.”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언젠가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 통찰의 순간이 오는 법. 네가 갑자기 깨달았다고 한 그 순간이니라. 통찰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반드시 넓게 보고 깊게 파헤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일컬어 오의 이치라고 하느니라.”...<『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설흔. 박연찬)>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로 사물을 설명합니다. ‘붉은 까마귀’라는 말을 모르고 있던 제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말로 그것을 설명하라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주문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면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말을 다 버리고 새로운 말을 배워야 합니다. 아는 것에 집착하던 제자가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야 비로소 ‘붉은 까마귀’를 본다는 것은 바로 그 ‘버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부터 말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시작됩니다. 스스로 버린다는 의식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붉은 까마귀’를 보는 일에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식 관심이 미리 정해진 것이라면 무엇을 인식하든 그것은 선입견이거나 편견일 뿐입니다. 객관적 인식이 ‘약(約)’의 경지라 했지만 그것도 인식 관심의 영역 안에서 요약되는 것이고, ‘오(悟)’라는 것도 결국은 나의 인식 관심이 절실히 요구하는 해답에 근접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인식 관심을 정하지 않고 나아가기, 언제나 모험으로 시작하기, 그런 것들이 좋은 글쓰기의 전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허심포산(虛心抱山), 아는 것만으로는 늘 부족하다는 말이 여기서도 통용되는 격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