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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1. 2019

문밖 것의 심술

소설 읽기

문밖 것의 심술


평생 소설가를 자처했지만 아직도 저는 소설 읽기가 서툴기만 합니다. 오독(誤讀)도 오독이지만, 여간해선 통독을 하지 못합니다. 작심을 하고 또 해야 남의 소설 한 편을 겨우 다 읽습니다. 게으른 건지 모자란 건지 모르겠습니다. 몇 줄 읽다 보면 이내 눈이 아파 옵니다. 그래서 아마 성공한 작가가 되지 못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소설가가 하는 말(사적으로 하는 담화!)에는 아낌없이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 ‘주변머리(?)’는 본디 아마츄어들의 속성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원래 ‘맨 얼굴’을 보는 것을 더 즐깁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재미 하나로만 평가한다면 분명 소설가가 사적으로 하는 말이 그가 쓴 소설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도 그런 경우입니다. 소설가가 ‘책 밖’에서 한 재미있는 사담 한 토막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 서울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에게 있어선 세상이 문안과 문밖, 둘로 나뉜다. 그 바깥은 잘 모르신다. 할머니는 세상을 문안과 문밖, 둘로만 구분하듯이 사람의 성격도 단 두 가지로만 구분하신다. 하나는 ‘암상’이고 다른 하나는 ‘심술’이다. 할머니의 지론대로라면 모든 사람은 그 둘 중의 하나에 속해 있다. <중략> 할머니의 말대로 그것은 그냥 척 보면 알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친구든 부부든, 주인이든 밑에 두고 부리는 사람이든, 암상과 심술이 서로 짝을 이뤄야 잘 산다고 생각하신다.… [천명관, 「수상소감」, 『문학동네』 41호, 28-9 쪽]


작가 천명관이 전하는 할머니의 지론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① 세상은 문안과 문밖으로 나뉜다. ② 사람은 암상과 심술로 나뉜다. ③ 척 보면 안다.>가 그것입니다. 모든 것을 두 개의 상반된 것들로 파악하고, 오직 경험칙과 직관에 의해서 그 인식 기준을 마련한다는 말씀입니다. 어저면 그것이 세상을 보는 가장 오래된 관점이고 가장 손쉬운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작가의 말은 언뜻 보기에는 할머니의 지론, 그 ‘무지막지한’ 지혜를 밝히는 말이지만, 사실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견지하는 ‘흑백논리’에 대한 부연설명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다른 인간과 그 주변 것들을 판단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소설도 그런 ‘무지막지한’,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분류 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을 미리 선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렇게 들립니다.

세상은 할머니의 말씀이 없으시더라도 결국은 문안과 문밖으로 나뉩니다. 문은 도처에 있고, 인간들은 누구나 그 ‘문’ 앞에서 둘로 나뉘어집니다. 내 집에서는, 내 문안에서는 내가 주인이지만 다른 이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패찰(명찰)을 달아야 됩니다. 패찰은 문밖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공식적인 기표입니다. 패찰이라도 달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낫습니다. 그는 어쨌든 문안 사람으로 인정되는 자입니다. 아예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자들은 문안 사람들에 의해서 ‘문밖 것’으로 비하됩니다. 그렇게 때로는 문안에서, 때로는 문밖에서, 사람 대접을 받기도 하고 물건 대접을 받기도 하며 사는 것인 인생입니다. 내가 가진 문안 세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내게 만만한 것이 됩니다. 그게 결국 잘 사는 겁니다. 보통의 인생에는 그런 게 정답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어차피 인간은 문 앞에서 둘로 나뉩니다. 문안에 든 사람에게는 보호와 특혜가 있고 ‘문밖 것’들에게는 차별과 박대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든 ‘문밖 것’ 신세를 완전히 면할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입니다. 가장 극명한 예가 ‘죽음의 문’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의 운명을 지닙니다. 그것 앞에서는 누구도 ‘문밖 것’ 신세를 면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문밖 것’ 신세이기에 그 ‘차별과 박대’를 면하고자 만든 것이 종교다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문은 ‘역설’의 논리를 즐겨 사용합니다. 물론 역설적으로 부자(富者)를, 현자(賢者)를, 강자(强者)를 문밖에 세우는 것들이 종교 말고도 또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역설’의 문은 어디에서고 존재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앞에 놓인 모든 문안에 다 들 수 없는 한 그런 ‘역설’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어쨌든 ‘문밖 것’ 신세가 되면 지문 인식도 안 되고 비밀번호도 알 수 없는 그 막막한 도어키 앞에서 하릴없이 좌절하고 분노하고 비탄에 빠지는 게 인생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온통 그런 ‘불통의 문’으로 인식될 때 인간은 자신의 생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포기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평생 문밖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상에 통하는 문을 하나 내려고 자신과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 ‘혁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혁명의 피 냄새를 피해서 ‘문밖 것’들이 문안을 유린(?)하는 것이 예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안을 조롱하는 ‘문밖 것’들의 비장의 무기, 문안을 한 순간에 문밖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예술입니다. 삶의 지루함을 타파하려면 예술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종교를 ‘문밖것’들로부터 조달받아야 하는 것이 문안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입니다. 문안의 삶은 영원히 그런 것들로부터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체적으로는 그것을 조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술과 종교는 세상의 핏줄에 피를 공급합니다.

소설은 그렇다면, 문밖 세상 어디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 하는 자들은 심술에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심술을 버리고 암상이 되면 소설도 끝입니다). 작가의 심술은 자기 자신부터 문밖으로 내몹니다. 몸과 시선이 따로 노는 것이 싫어 자학과 도착이 일상이 됩니다. 일상이 문안으로 삼투되는 것을 끝까지 막아내려고 사투를 벌입니다. 그래야 문안에 있는 자들에게 ‘비타민’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문안 사람들에게는 소설(문학)이 육체의 건강을 돕는 비타민(부수적 가치)일 뿐, 본질을 다루는 정신세계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예술하는 인간’은 그저 변종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찮은 것들(문밖 것들)에 의해 문밖으로 밀려난다는 자괴감을 상쇄합니다. 그저 지루함을 가져간 대가라며 돈을 지불하고 무마합니다. 문밖에서의 자학과 도착이 문안에서의 문화와 교양이 되는 건 그래서 역설, 혹은 반어가 됩니다. 그 역설과 반어, 교양과 문화의 줄타기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소설가가 될 수 있습니다. 줄타기는 곡예입니다. 모험과 위험이 없는 곡예는 더 이상 곡예가 아닙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늘 모험과 위험을 자처하는 삶을 누리는 자가 바로 작가입니다.


지난 일요일, 가까운 지인의 혼사에 참획하였다가 추억 어린 문안 세상 하나를 잠깐 엿보고 온 일이 있었습니다. 예식이 있던 호텔 뒤편에 100년 된 사과나무와 그 주인이 살던 건물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선교사 사택입니다. 병원 뒤 언덕 위에 있던 그 집은 그 주변을 놀이터로 삼고 있던 우리들에게는 일종의 비밀의 성채였습니다. 저는 늘 그 성채의 문밖에서 서성이곤 했습니다. 그 근처에서 오래 머무는 것 자체가 모험이고 도전이었습니다. 어디선가 금방 잡역부 아저씨가 나타나 우리를 쫓아내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 아저씨가 시커먼 굴뚝 아래 어디에선가 나타나는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그 굴뚝 아래 어딘가에는 병원에서 나온 시체를 태우는 화장장이 있다고 우리는 수군댔습니다. 그곳은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엄숙했던 세상은 허물어져 낡은 기와와 색바랜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로 희미하게 그 영락한 자태를 드러낼 뿐, 예전의 그 비밀과 엄숙은 아예 자취를 감추고 없었습니다. 대로가 뚫린 반대편 입구에서 채 몇 걸음도 되지 못한 곳에서 그 비밀의 성채는 자신의 알몸을, 울타리도 없이, 그 모든 것을, 중인 환시리에 다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저 아득히, 햇볕에 그을린 촌부(村婦)의 맨얼굴처럼, 머슥한 표정으로 거기 있었습니다. 이국적이기만 했던 선교사 사택. 한옥과 양옥의 기묘한 조화. 성(城)안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성문 밖 동산 마루턱에 자리 잡고 있던 그 선교사 사택, 그 신비의 아우라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싸구려 유흥지가 되어 성밖 것들의 흐트러진 발걸음 밑에서 속절없이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평장으로 된 선교사들의 무덤은 오직 돌비석 하나로만 자신의 존재를 간신히 알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옛날의 그 위세도, 죽은 자의 영원한 평안도 없었습니다. 문밖 것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 한가운데서 그저 남루할 뿐이었습니다.
끝내 내 문안에 들지 않는 것들과는 선선하게 작별할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아무런 희생도, 제대로 된 대가도 없이, 내 문안에 들어오는 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산의 선교사 사택은 영원히 저를 ‘문밖 것’으로 내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했습니다. 그 ‘우울’이 또 저의 심술을 부추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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