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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20. 2019

천년의 사랑

송재학 <비밀>

천년의 사랑


“적어도 세 사람하고는 살았던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니 모두 웃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결혼 생활 40년 동안 제가 겪은 아내가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초, 아이들 한참 클 무렵, 그리고 인생 말년, 그렇게 세 번쯤 집사람이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라 제 느낌이 그렇게 변화를 겪는 것이겠지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도 포함해서 동네 후배들과 같이 점심을 먹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나이 든 총각 친구가 며칠 전 선 본 이야기를 하고(아직도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를 열창했습니다), 그 이야기에 자극받아서 결혼 25년차에 접어든 한 친구가 "나이 들면 여자는 바뀐다"라는 취지의 말을 보태고, 연이어서 제가 그렇게 재차 부연설명을 했던 것입니다

언제가 가장 좋았는가? 입장을 바꾸어서, 나는 아내에게 몇 사람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식사를 마치고 제 방에 돌아와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내는 지금의 아내가 그중 나은 것 같습니다만 아내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언제의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을까요? 아내가 말이 없으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좋은 이유는 몇 가지 요약이 됩니다. 짜릿한 것들은 없지만,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고독감을 능숙하게 무마시키는 어떤 자연스럽고 편안한 힘을 보여줍니다. 어머니 느낌도 나고 자주 입어 제 체형이 새겨진 헌옷 느낌도 납니다. 두부 구울 때 나는 냄새도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일상의 빈 곳을 채곡채곡 채워준다는 느낌도 듭니다. 소유해서가 아니라 존재해서 만족을 줍니다. 그게 참 좋습니다(아내에게도 제가 그렇기를 바랄 뿐입니다).공연한 주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부가 해로하면서 그런 염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아닌가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왠지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아서 사족을 그렸습니다. 예전에 써놓았던 글을 다시 꺼냈습니다. 경주에 있는 흥덕왕릉을 초견(初見)하고 저도 모르게 싱숭생숭했던 마음을 어설피 풀어놓았던 것인데 몇 자 고쳐서 다시 내놓습니다.


.....신라 흥덕왕릉은 경주 외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이 그리 곱상치만은 않습니다. 볼 때마다 성가신 몇 채의 냄새나는 우사(牛舍)와 마치 실타래처럼 풀어져 미로인양 나대는 좁은 농로(農路)를 군데군데 앞세우고 왕릉은 나그네의 시선을 피해 저 뒤에 꼭꼭 숨어 있습니다. 우정 작심하지 않고서는 쉬이 만날 수 없는 곳에 들어앉아 있습니다(진평왕릉과는 참 대조적입니다). 길에 차를 두고, 농가를 가로질러 우거진 송림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무열왕릉이나 김유신장군묘(흥무왕릉)와는 애초부터 앉아있는 품새가 다릅니다(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이가 흥덕왕입니다). 마치 죽어서나마 그렇게 자기 삶(존재감)을 은밀하고 온전하게 지켜내고 싶다는 망자의 의지를 보는 듯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왜 이리도 멀리, 불편하게, 떨어져 있을까?”라는 초행길에서의 불평과 의문이 일거에 해소가 되었습니다. 왕은 살아서 꽤나 풍진 세월을 보냈을 겁니다. 죽어서나마 고즈넉하게 자기만의 삶을 넉넉하게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그렇게 공간에 반영되었을 겁니다. 아마 그게 맞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흥덕왕릉을 두고는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돕니다. 울울한 도래솔과 함께 반전이 있는 공간으로 널리 회자되곤 합니다. 능역 안으로 들어가 보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그만한 왕릉도 없습니다. 여름에 가면 가족 나들이를 나온 이들을 꼭 만납니다. 자리를 깔고 앉아 조용한 야유회를 벌이는 장면을 종종 봅니다. 그만큼 사람을 편안하게 감싸는 곳입니다. 주변 환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석물을 위시한 왕릉에 부속된 기물들의 보전 상태도 거의 원형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무신상(武臣像)이 서역인의 모습인 것도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흥덕왕릉만큼 튼실하고 모양이 예쁜 신라왕릉도 없을 것입니다. 태종 무열왕릉 정도가 비견될 뿐입니다. 그러나 왕릉의 주인공 흥덕왕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은 별로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흥덕왕의 치세와 슬픈 부부연에 얽힌 사연은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무능한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장보고를 시켜 청해진을 설치케 하고,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大廉公)을 시켜 지리산에 차를 심게 하고, 질녀였던 아내 장화부인의 때 이른 죽음을 절절히 애도해 내내 독수공방으로 일관하고, 합장을 유언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11년만에 죽은, 후사를 두지 못해 귀족 간의 잦은 왕위 찬탈의 빌미를 제공하여 왕국의 멸망을 재촉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이를테면 비운의 왕이었던 셈입니다. 그 내용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음택이 왜 이리 안온한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외곽의 후미진 곳에 홀로 머물며, 얼룩진 살아서의 풍진 세월들을 천년에 걸쳐 조금씩이나마 닦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묘한 수천 그루의 도래솔이 장관(壯觀)인 송림이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왕릉은 서역 무사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천년의 세월을 호위하는 그들은 천년의 햇빛과 천년의 바람과 천년의 비를 견딘 자들입니다. 제게는 잘 보존된 왕릉보다도, 기기묘묘한 솔숲보다도, 이방의 세월을 말없이 견디고 있는 이 돌로 된 무인석들이 더 애틋했습니다. 오직 지키는 일 하나로 천년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애절하기만 합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한쪽이 여자 무사였다면 좀 덜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왜 제 마음을 애닯게 하는지 속시원히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그들이 왜 제 삶의 대유가 되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송재학 시인의 <비밀>이라는 시나 읽으면서 그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볼까 합니다.


비밀(송재학)

1
흥덕왕릉의 숲에는 비밀이 있다 섭씨 19도, 서풍과 함께 듣는 솔방울 소리, 부재를 위해 텅 빈 공간이 부푸는 한낮, 밤이 아니라도 등불이 하나 둘 차례차례 켜지는 느낌, 일만 그루 소나무가 손 뻗어 나를 만지도록 정지하는 것, 일만 그루의 소나무에 매달리는 섬모 운동,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우는 울음이다

2
비밀이 탄로난 이유가 갑자기 휘몰아닥친 장대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왕국을 베고 눕고자 했다 왕이 누리던 고요 외에 십삼층 석탑 같은 왕의 비애를 열어 보고자 했다 어떤 기미도 없이 절규의 힘으로 빗방울이 관 뚜껑 닫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왕국의 슬픔이다.

주: 홍덕왕릉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인근의 신라왕릉이다. 흥덕왕은 죽은 장화 부인을 못 잊어 내내 독신으로 살았다.


사족 한 마디. 자기가 지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마치 무인석처럼 무엇인가를 잔뜩 지키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답답합니다. 시인과 저는 젊어서 많이 친하게 지냈습니다. 때론 서로 지키는 게 판연히 다른 것 같기도 해서 뜸하게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천년은 아니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게 아니란 걸 알겠습니다. 서로 지키는 게 하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진정 지키는 자는 무엇을 지키는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지켜서 아름답기만을 바라는 것만이 그들에게는 소중할 뿐입니다.
<2013. 11. 20.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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