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불 속으로
입화자소(入火自燒)
“좀 으스스 한데요.”
부탁받은 글귀를 보고, 서예가 선생이 그렇게 말했답니다. 시 쓰는 선배 한 분이 일 년여 저와 함께 운동을 한 후 액자를 한 편 선물했습니다. 그 며칠 전, 좋아하는 글귀가 있느냐고 물으시길래 ‘입화자소(入火自燒)’라고 말씀드렸더니 그것으로 유명한 서예가에게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부탁해 액자를 하나 만들어 오신 겁니다. 서예가 선생과는 아직도 일대면이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 이름은 그림하는 친구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무척 고마웠습니다. 저나 시인 선배나 서예가 선생이나 모두 불혹을 갓 넘겼을 때의 일입니다. 액자는 애지중지, 늘 저의 시선이 닿는 곳에 걸어두고 있습니다. 십여 년 동안 집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가 지금은 제 연구실 잘 보이는 곳에 모셔놓고 있습니다.
입화자소(入火自燒)는 ‘불 속에 들어가 제 몸을 태우다’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웬 소신공양(燒身供養)이냐라고 반문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입화자소(入火自燒)라는 말은, 제게는, 막신일호(莫神一好)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앞에서 막신일호를 말하면서 글의 말미에 ‘(어느 하나에) 미친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가 연소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내부(內部)의 연소(燃燒)’라는 말의 출처가 되는 것이 이 입화자소라는 말입니다. 본디 입화자소(入火自燒)라는 말은 동양적 신비주의의 관점에서 신선(神仙)과 관련되어 생성된 것입니다(이하, 『동양적인 것의 슬픔』(정재서, 살림) 참조).
<열선전(列仙傳)>에 기록된 초기 신선 중의 일부는 직업이 아예 야장(冶匠,대장장이)이거나 최소한 불의 탁월한 운용자였습니다. 유명한 신선이었던 적송자(赤松子)는 ‘불 속에 들어가 제 몸을 태우는(能入火自燒)’ 능력을 지녔고, 영봉자는 도공(陶工)의 우두머리(불로 도자기를 굽는 기술을 아는 자)였으며 양모(梁母), 사문(師門) 같은 신선들도 모두 불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불의 통어(mastery of fire)가 주술적 비상(magical flight)의 능력(득선의 경지)으로 직결된다는 생각이 고대인들을(특히 우리 동이계 문화권에서) 지배했다는 설명입니다.
불의 통어는 야금술적 단계(용광로에서 철을 제련하는)에서 연금술적 단계(화로 속에서 단약(丹藥)을 제련하는)로 변화합니다. 후한인(後漢人) 위백양이 장백산의 진인(眞人)으로부터 금단의 비결을 전수받아 이루어진 것이 바로 금단도교(金丹道敎)라는 기록이 송인(宋人) 증조가 편찬한 <도추(道樞)>라는 책에 실려 있는데, 이는 일찍이 불의 통어를 중시하던 우리 선조들의 사유(思惟)가 중원으로 흘러 들어갔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뒤 수와 당 이후의 중국 도교에서는 수련의 비중이 외단(外丹)에서 내단(內丹)으로 바뀌어져 외부의 불이 아니라 신체 내부의 화후(火候,불기운)를 조절하는 것을 득선의 중요한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어쨌든 고구려에서 단약 제련을 중심으로 하는 금단도교(金丹道敎)가 발원했다는 것은, 문화사적으로 우리 민족이 야금술 및 연단술에 일찍부터 통달해 있었다는 사실과도 부합되는 것입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야장신(冶匠神)을 치우 혹은 그에 상당하는 신화적인 영웅으로 추정하는 것이 최근의 학계 동향이고 보면, 우리 민족이 예부터 ‘불의 철학’을 깊이 있게 추구해 왔으리라는 짐작을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중국 도교의 흐름이 외단에서 내단으로 그 수련의 비중이 변화하였다는 말을 했는데, ‘불사(不死)의 단약(丹藥) - 금단(金丹)’을 제련하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큰 변화이겠으나, 그런 이해는 물질적 세계관의 전통(혹은 실용, 실리적 세계관의 전통)이 깊은 중국의 사유체계에서 본 관점이고, 우리 선조들의 사유체계, 즉 우리 민족 고유의 형이상학으로 내려오는 불의 철학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사실상 그것은 본질적 차원의 변화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외부의 불을 통어함으로써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불기운도 통어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 외부의 불을 통어하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불의 철학을 역설적으로 예증하는 것이 바로 전 세계적으로 우리 민족에게만 그 존재가 확인된다는 이른바 ‘화병(火病)’, 혹은 ‘울화병’의 실재성일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도 그 사실이 공인된 바 있다는 ‘화병’은 결국, 우리 자신 내부의 불기운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음으로써 발병되는 질환이 아니겠습니까? 왜 ‘화병(火病)’이 우리 민족에게만 존재하는가? 우리 민족의 ‘불의 철학’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물음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입화자소(入火自燒)는 먼 나라의 신선놀음이 아니라 당면한 우리의 문제일 것입니다. ‘불 속에 들어가 능히 자신을 태운다’는 것은 곧 ‘내부의 불기운을 조절한다’라는 뜻이고, 심리학 용어로는 ‘자기 내적 심리 에너지의 변환’일 것이고, 비약이 허락된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그와 같은 ‘불의 철학’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 있으므로(그것에 실패하면 ‘화병’에 걸릴 지도 모른다) 너나 할 것 없이 입화자소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