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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16. 2023

소설, 레드빈 케이크 4

레드빈 케이크(4)   

  

내가 죽음을 본 것은 열네 살의 봄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육체를 반납하고 작고 가벼운 영혼으로 마치 증발되는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해 영구차가 기다리는 골목 밖으로 운구했다. “왜 이리 가볍지?” 사람 좋아 보이는 운구차 기사 아저씨는 마치 아버지와 나를 위로라도 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죽음도 그렇게 가볍게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3월은 아주 추웠다. 따듯한 남쪽나라의 봄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그렇게 추웠던 시간은 없었다. 지금은 산복도로로 바뀐, 학봉 중턱의 화장장 마당에서 그 모진 추위 속에서 벌벌 떨었다. "추우니 들어오라우!",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육신이 한 줌 재로 변하는 곳보다는 추운 바깥이 나았다. 어머니의 육신이 완전히 연소되기를 기다리던 두어 시간 동안은 기억 속의 한 섬으로 남아 있다. 그 앞뒤로 어떤 기억도 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간혹 고색창연했던 화장장의 풍경이 생각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세부는 전혀 그려낼 수 없다. 그림 하나 없이 비어 있는 그 시절의 빈 화폭이 우울할 때도 있지만 애써 기억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근 1년 동안 막내아들과의 접촉을 마다했다. 어머니가 누워있는 방에는 오직 아버지만 드나들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몰락을 나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지금 남아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에 제일 또렷한 것은 ‘장난감 도시’에서 방바닥에 도화지를 놓고 밑그림 하나 없이 풍경화며 인물화를 슥슥 그려나가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런 어머니의 그림 솜씨를 자주 빌린 사람은 형의 담임선생님들이었다. 학기 초 환경 미화 작업을 어머니가 많이 도왔다. 어머니는 영화나 극장 쇼 보기를 즐겼다. 인근 극장에 쇼가 들어오면 꼭 아버지와 함께 구경을 갔다. 그리고 또 하나, 어머니의 맛있는 팥밥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의 재능이라는 것을 나는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내는 내게 단 한 번도 팥밥을 해준 적이 없다. 

팥밥 잘 짓고 팥밥 좋아하는 것을 두고 내 마음대로 견강부회하면 어머니와 나는 팥쥐다. 어머니는 한 마리 아름답고 숙성한 어미 팥쥐, 나는 그녀의 작고 어린 새끼 팥쥐다. 그런 심리적인 유대는 사실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막내인 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고 형과의 나이 차이도 많아서 경쟁자 없이 어머니를 독점할 수 있었다. 

“조근놈은 외탁이야.”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주로 나를 품안에 안고 있을 때였다. ‘형들’이라고 하지 않고 꼭 ‘형’이라고 했다. 그게 어머니의 상처라는 것을 형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우리는 어머니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이북에 두고 내려왔다. 누가 말했던가, 비극은 모두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다고. 어머니의 실수는 평생 아버지와 자신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비약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 마더 콤플렉스, 모성 복합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을 공산이 크다. 큰형에 대한 죄의식, 형에 대한 미안함, 어머니의 가련한 신세에 대한 동정심, 아마 그런 것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그때는 그렇게만 여겼다) 어린 팥쥐의 여린 무의식을 유린했을 공산이 크다. 그런 게 팥쥐의 이중성이다. 겉으로는 밝고 가볍지만 안으로는 어둡고 무겁다. 또 그것이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타나토스로,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콤플렉스 없는 콩쥐들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강력한 유혹으로 작용하는 적두병의 달콤한 팥소는 결국 어머니의 몸이었다. 내 모든 신경증의 근원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신경증 하나만 두고 보자면 내가 팥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연유는 간단했다. 핏줄도 경험도 체질도 문화도 아니다. 그냥 어머니다. 팥은 어머니에 대한 내 집착 그 자체다. 그 사실이 새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슬플 것도 없다. 그것도 ‘사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소환되지 않는 기억들, 내 안의 저 깊은 감옥 안에 미결수로 남아 있는 것들, 가끔씩 그것들이 내 안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까닭 없이 서글픈 감정, 사지를 녹이는 듯한 무력감, 출처를 알 수 없는 증오심, 대상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분노... 그들은 그런 감정의 상태로 내게 나타난다. 그저 웅웅거릴 뿐, 정작 자신의 실체를 뚜렷하게, 인과성과 전체성으로, 완결된 그림의 모습으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적두병은 하나의 예외였다. 내게 몸을 나누어준 어머니의 존재가 그렇게 뚜렷하게 형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거의 기적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신성현시(神聖顯示)나 되는 것으로 추켜세울 생각은 전혀 없다. 그것 역시 사건 그 자체다. 다만 그것을 둘러싸고 웅웅거리는 것의 전모(全貌)를 조각 그림으로 조금씩 맞추어나갈 때 허전함이 많이 줄어든다. 아직 캔버스는 많이 비어 있다. 화폭에 담을 만한 조각 그림들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걱정이다. 좀더 많은, 선명한 에스키스(esquisse, 초벌그림(下畫), 약화(略畫), 화고(畫稿) 등의 뜻이다)들을 찾아내야 한다. 내가 가진 기억들은 공백이 많소 이미 낡고 색이 바래서 그 진위(眞僞) 여부가 불투명한 것도 많다. 그것들을 기초로 어떤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게 애당초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색이 뚜렷하고 형체가 완전한 것들이 오히려 가짜거나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일 확률 역시 높다. 그런 것들은 카타콤의 이콘(icon)들처럼 의식의 침입으로 재구성된 것들일 공산이 크다. 이미 내 집착이 부여한 가짜 의미들이 반영된 이미지들인 것이다. 그것들은 진짜 내 기억이 아니다. 가짜들로부터 진짜를 가려낸다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냥 써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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