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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9. 2019

넘치는 것들

태어나면서부터 미쳐 있는 아이들?

넘치는 것들


우리는 흔히 어린이, 혹은 동심을 순진무구한 그 어떤 상태로 상정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보는 인간은 그와는 반대의 모습을 가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멜라니 클라인은 아동이나 성인을, 모친의 가슴에 매달려 있었을 때의 노여움에 찬 유아적 정신병에서 회복 단계에 접어들어 있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클라인의 이야기는 편집증과 우울증을 오락가락하는 보편적이고도 병리적인 유아적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다. 클라인에게는 인간의 생애가 광기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이 광기는 타인의 광기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한다. 비록 운 좋은 처지에 놓이거나 정신분석가의 도움을 받는 수도 있기는 하나 인간은 그 후로도 다소간 미쳐서 살아간다. 흔히 쓰는 말속에 나타난 어느 부분들, 예를 들어 마녀, 독살스런 태도, 애타게 하거나 골 빠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은유들, 혹은 어떤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의 일반적 인정, 이 모두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유아기의 처벌, 강박관념, 유린에 대한 유아적 환상을 강조하는 이론을 지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로이 샤퍼, 「정신분석학적 대화에서의 서술」, (『현대서술이론의 흐름』) 중에서]


우리의 삶이 이미 그 출발선 상에서 ‘미쳐 있다’는 가정은 여러 가지로 편리한 설명의 수단들을 선사한다. 다른 것보다도, 우리가 ‘책 읽기’를 강조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받을 수 있다. 독서를 통해, 성숙을 도모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서서히 치유된다고 믿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기에 놓여 있는 어린 주체들에게는 독서를 통한 ‘자기 이야기의 발굴’이 그 미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는 ‘남의 이야기’들은 어린 환자들이 자신의 서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특별한 효능을 발휘한다고 설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화도 좋고, 위인전도 좋고, 소설도 좋고, 일기도 좋은 것이니 많이 읽으라고 권할 수 있다. 이런 주장에는 무엇보다도, 누군가의 플롯이 나의 플롯 만들기를 도와서 내 플롯을 완성시킨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하인츠 코후트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아동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자아(cohesive self)를 실현하기 위해 거의 본능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동들이 겪는 ‘분열의 산물’(과대망상적이고 자기 위안적인 환상, 방어적인 분열과 억압, 우울증과 같은 병리적 증세)들은 분열된 자아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치유하고 성장을 계속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은 조금 과하다. 내 생각에는 그의 이론은 ‘넘치는 것들’에 속한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싫든 좋든, 문학과 정신병적 기록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정신분석 앞에 서면 시인 작가들이 다 초라해져야 한다. 그 상황이 당연한 것일까? 문학이 오히려 정신분석의 무의식이라는 건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정신분석을 초인지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문학이다. 내려다볼 수 없는 학문은 사이비일 공산이 크다.


무엇이든 돌아올 수 없는 차표(원웨이 티켓)만 강요하는 것은 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병적인 모습만 보는 것도 병적이다. 정신분석만 그런 것은 아니다. 기호학적인 분류 작업도 가끔씩 황당한 결론을 내기도 한다. 학문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 중심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수준 낮은 아동문학이나 대중문학(주변문학)은, 수준 높은 성인문학이나 본격문학과 비교될 것이 아니라, 음악과 한 가지로 (특히 고전음악) 반복적인 형식을 존중하고 규범성을 존중하는, 별개의 ‘독자 예술’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견해(규범적 예술양식, 비규범적 예술양식으로 나누는 견해)도 그렇다. 많이 넘친다는 느낌이 든다. 아동문학이든 성인문학이든 모두 다 문학의 한 갈래인데 문자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어느 것 하나 같이 취급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무래도 쉽게 이해가 안 된다.


만약 기호학적 주장을 차용하고 있는, 이른바 ‘동화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 사실이 ‘사실’이라면, 어릴 때 동화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정신적으로 큰 결핍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을 지게 된다. ‘어릴 때’ 아니면 읽기 힘든 책들이라 나이 들어 그것을 보충할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동화책을 읽으며 내부적으로 ‘정보가 환기되는’ 경험을 겪어보지 못한 자들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큰 결핍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체 발광’의 창발적 경험을 소지하지 못한, 일종의 정신적, 심리적 불구 상태를 성인이 되어서도 겪어야 한다는 주장이 되는 셈이다. 백보를 양보해도, 그런 주장은 가는 표만 있고 돌아오는 표는 없는 편도성 억지 주장이다. 아동문학을 별개의, 독립된 장르로 자리매김하려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이론을 갖다 쓴 것 같다.


참조 1 : 아동문학은, 우리가 대학 입시를 위해 고등학교 공부를 하듯(인문계 고교는 전적으로 예비학교다), 성인이 되었을 때 보다 더 깊이 있는 문학 체험을 하기 위해서 거치는, 인지 발달 단계에 맞게 조절된, 일종의 예비 코스 과목일 뿐이다. 초기 문식력 배양에 유용한 텍스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초등학교 때 이미 『삼국지』나 『데미안』에 맛을 들인 아이가 우정, 오직 규범적 텍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전래동화집을 다시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굳이 한 가지 유념할 점을 찾는다면, 아동기 서술적 정체성 확립에 필요한 심리학적 효용은 다분히 인정될 수도 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선악의 문제, 정의와 배려의 문제, 희생과 헌신의 문제, 금기와 사회화의 문제와 같은 아동기 서술적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들은 전래 동화와 같은 아동문학으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참조 2 : ‘정보의 내부 환기’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규범적 텍스트에서 구조는 정보의 본질이다. 구조는 수신자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보를 구성하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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