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또 언젠가 다시 쓸 날이 오겠지
살다 보면 나도 잘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나의 경우 글쓰기가 그랬다.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라고 종용하는 일이 없는 집에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딱히 글을 읽을 일이 별로 없었고 글을 쓸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어쩌다 보니 수학머리가 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고등학교 시절 이과를 선택했고 자연스럽게 공대를 가게 되면서 글과는 더더욱 멀어졌다. 사회생활도 당연 공돌이들이 득시글하는 곳에서 시작하다 보니 글이란 게 내 삶에 침투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사회생활과 육아에 지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해 나날이 피폐해져가고 있던 때, 우연히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됐고 그제야 알았다. 아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매일 글을 썼다. 브런치에도 쓰고 블로그에도 쓰고 인스타에도 쓰고 플랫폼마다의 장점을 살려 각기 다른 형태와 다른 주제의 글들을 신나게 썼다.
그렇게 매일 글을 썼는데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 목마름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이 부족했다. 당장 눈앞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삶의 순간에 쓰고 싶은 글이 생기면 그때그때 메모장에 남겨두었다. 이 소재는 오늘 꼭 써야지, 이 이야기는 깊이 생각해 보고 써야 하는 거니까 두고두고 써야지, 이건 경과를 지켜본 다음에 과정까지 자세하게 써야지. 그리고 바쁜 회사생활과 육아에도 틈틈이 짬이 나면 글을 써나갔다. 글을 쓰기 위해 아침잠도 줄이고 밤에도 늦게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브런치에는 오로지 글 쓰기가 너무 좋아서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시간적 여유가 많아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 보였다. 나에게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정말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앉아 글을 쓸 텐데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휴직을 결심했고, 결국 1년 여의 휴직 끝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혹독하게 싸우며 달려온 탓에 나의 심신은 회사생활과 가정생활을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부와 명예 모두 좋지만 이렇게 매일매일 벼랑 위 외줄 타기 하는 사람처럼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차가운 둥지에서 겨우겨우 목숨만 연명해 나가는 예쁜 파랑새의 모습이 이런 걸까 싶었다. 그래도 물불안 가리고 고군분투해 온 덕분에 그럭저럭 먹고살만한 형편이 됐다. 그래서 이제 혼자 일하기로 했다. 거대한 시스템에 맞추느라 나와 내 가족을 희생하지 않고 내 스스로 내 일을 일궈서 먹고 살리라. 그러면 내 시간도 내가 알아서 쓰니까 글도 더 많이 쓸 수 있게 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처음 몇 개월은 아직 욕구가 불타오르고 있었고 또 써오던 루틴이 있어서 그럭저럭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글을 쓰지 못하게 됐다. 시간이 많아졌는데 왜 그런 걸까. 심지어 가장 최근 글이 무려 1년 전 글이라니. 휴직 이후로 드문드문 써왔던 글들을 읽어보니 시간이 많아짐과 동시에 바뀌어버린 라이프스타일에 적응하는데 나는 꽤 많은 기간이 걸렸던 것 같고, 그 과정에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가 또 지옥에도 갔다 왔다가 했던 것 같다. 정확한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 안의 나와 계속 싸우다 보니 불평불만이 가득 차오르기도 했었는데, 그 넘치는 파이팅을 글로 승화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나중에 그 글을 읽을 때 치기 어린아이 같아 보일까를 걱정했던 것 같다. 그것도 다 추억인데 그냥 열정 터지게 싸질러 볼걸... 비록 다시 읽으며 숨김처리 해버리더라도 말이다.
이제 다시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뭔가 마음의 변화가 생겼나 보다. 아니면 또다시 파이팅 넘치게 돼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다시 또 써볼까 싶다. 예전처럼 뭘 쓰고 싶다 마음이 충만해 글감 주머니를 가득 채운 상태는 아니지만 그냥, 아무거라도 써야겠다.
여름이 다 지나서 선풍기를 창고에 넣으려고 싸뒀는데 며칠째 창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다. 영영 못 쓰게 되는 게 아니고 잠깐 안 쓸거라 넣어두는 건데 뭐가 그렇게 아쉬운가? 사실 귀찮아서 못 넣은 거지만… 문득 저 애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쓸 때 되면 다시 꺼내서 쓸게. 나도 이제 다시 쓸 때가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