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은 떠드는 곳이 되어야 한다

미래의 도서관, 경기도서관

by 수호

제게 도서관은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시험 기간만 되면 교과서와 문제집을 한아름 챙겨 도서관을 찾았고, 입을 꾹 다문 채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공부와 졸음, 딴짓의 비율이 1:1:1에 달했으니 치열하게 공부만 했다고 하긴 민망하지만, 도서관을 찾는 목적만큼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숨죽여 공부하기 위해 그곳에 갔습니다.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생 때까지 제게 도서관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특징인 '노빈손'의 모험담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고, 세상만사를 설명해 주는 '십 대들을 위한 ~' 책들을 읽으며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해 갔습니다. 때로는 처음 보는 친구와 뛰어놀고, 친절한 사서 선생님의 흥미진진한 특강에 빠져들었습니다. 매주 주말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향한 도서관에서 저는 세상을 넓혀갔습니다.


작년 가을 개관한 경기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전국 공공도서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개관 이전부터 눈여겨보던 곳입니다. 방문 전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찾아봤는데, 예상과 달리 부정적인 반응이 적지 않았습니다. '너무 시끄럽다', '조용히 책 읽을 곳이 없다', '도서관인데 열람실조차 없다' 등등, 도서관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정숙'과 '학습 시설'이 부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지금까지의 도서관과는 다르다는 것이죠.


직접 둘러본 저 역시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도서관과는 다르구나. 하지만 평가의 방향은 반대였습니다. 제게 경기도서관은 기준 미달의 부족한 공간이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미래의 도서관으로 느껴졌습니다. 각자가 고립되어 지식을 욱여넣는 곳이 아니라, 사람과 책, 그리고 AI가 적극적으로 연결되며 새로운 사유를 창출하는 곳.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도서관이었습니다.



69097.width-2000.jpg 이우환, <대화>, 2017.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 키워드를 꼽자면 'AI'와 '환경'입니다. 이곳에서는 AI 로봇이 건물 곳곳을 누비며 도서관 이용과 도서 위치를 안내합니다. 다양한 AI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는 AI 스튜디오, AI와 함께 책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AI 독서토론 공간 등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재정비 중이라 직접 활용해보진 못했지만, AI를 단순히 맹신하는 대신 해답을 함께 찾아가는 파트너로 바라보는 관점이 느껴졌습니다. 운영이 안정화된다면 책을 재료로 삼고 AI를 동료로 삼아 사유를 길어 올리는 훌륭한 공간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기후위기 대응과 같은 환경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점도 인상적입니다. 4층의 환경 서가부터 1층의 체험 공간까지 도서관 전체가 기후위기 극복과 지속가능성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도서관이 사유하고 문제를 고민하는 공간이라면,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인 기후위기를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단순한 도서 큐레이션을 넘어 디지털 체험 부스나 업사이클링 공방 등 지식을 실천으로 확장하는 콘텐츠들도 돋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시끄러운 도서관'을 지향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외부와 차단된 열람실을 없애고 건물 중심을 개방한 구조 탓에 기존 도서관의 정숙함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는 책이나 스마트폰에 갇혀 고립되는 대신 타인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연결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보드게임과 디지털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는데요. 타인과 긴밀히 협력하거나 경쟁하는 게임이야말로 대화보다 더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연결'에 방점을 찍은 도서관의 지향이 명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도서관 본연의 기능이 소홀한 것은 아닙니다. 장서량이 절대적으로 많진 않으나 문학, 인문, 사회, 과학 등 분야별로 고전과 신간을 알차게 갖췄습니다. 특히 일반 도서관에서 보기 드문 큰글자책부터 묵점자책, 다국어 도서가 잘 채워져 있고, 도서관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은 아트북 라운지까지 갖춘 점은 놀라웠습니다. 전시와 체험, 강연, 모임 공간 등을 두루 갖춰 문화 커뮤니티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직접 이용해보진 못했지만, 책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책공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경기도서관을 둘러보며 오랜만에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세상을 넓혀주는 도서관. 사유와 협력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인간보다 AI가 잘하는 시대,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도서관은 더 이상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도서관은 책으로부터 생각의 재료를 얻고, 타인이나 AI와 소통하며 사유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곳, 그리하여 지속가능한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닐까요? 경기도서관에서 도서관의 미래에 대한 실마리를 얻은 듯했습니다. 더 많은 미래의 도서관에서, 더욱 커다란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 지하 1층의 매거진 클립존에는 수많은 잡지들이 모여있는데요. 그중에 제가 제작했던 지역어 매거진 <TAET>도 비치되어 있었답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요! 혹시 경기도서관에 방문하시게 된다면 한 번쯤 구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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