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속 게임, 게임 속 사회
게임을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책들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 | 최태섭 | 한겨레출판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 윤태진, 김지윤 | 몽스북
게임의 사회학 | 이은조 | 휴머니스트
전 6살 때부터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뽀롱뽀롱 뽀로로>나 <아기공룡 둘리>를 보느라 게임은커녕 컴퓨터 전원 켜는 법도 모를 때죠. 쥬니어네이버를 통해 게임의 세계에 입성한 이후 성인이 된 지금까지, 게임은 제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회화가 이루어질 시기의 최대 관심사가 게임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게임을 통해 사회를 배웠습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게임은 분명 제 인생의 스승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는 극소수일 것입니다. 비게이머는 물론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게임은 현실 사회와 분리된 세계라는 인식이 일반적입니다. '분리'에서 그치면 다행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이 개인과 사회에 악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죠. 대학교에서 만난 한 친구는 제게 "넌 술담배도 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왜 게임은 해?"라고 물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어떤 대답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게임은 사회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게임을 하고, 게임 속에서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이는 게임을 옹호하고 어떤 이는 게임을 비난합니다. 게임은 거대한 산업이자, 정치적 쟁점이며, 의학적 관심사이고, 대중적 문화이면서, 제도적 스포츠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게임이 사회적임을 보여줍니다. 이번 글에서는 게임과 사회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합니다.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
최태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
"몇 겹의 아이러니 속에서 산업이자, 예술이자, 놀이이자, 매체로서의 게임이 존재한다. 게임은 우리에게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즐거움과,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을 준다. 예기치 못한 인연과, 작은 승리들의 기쁨도 준다. 하지만 이것을 마음 편히 즐기려면 게임이 게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게임이 몰입의 핑계를 대면서 은근슬쩍 사람들의 삶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재미라는 핑계를 대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인류의 긴급한 퀘스트에 역행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 책 속에서
오늘날 게임은 전 세계 29억 5,900만이 즐기면서 시장 규모가 1,266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문화산업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높아진 게임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게임과 사회 사이의 거리는 멀기만 합니다. 오히려 게임계 안팎의 격렬한 논쟁들로 인해 둘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하고 있습니다.
문화, 젠더, 계급을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이어오던 사회학자 최태섭은 30년 이상 경력의 게이머이기도 합니다. 이런 저자에게 떠오른 문제의식은 "게임을 정당한 방식으로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저자의 고민 결과가 게임에게 사회를, 사회에게 게임을 소개하는 책,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입니다.
책은 게임이라는 매체이자 문화이자 산업을 다차원적으로 조망하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전반부에선 다양한 통계 자료를 기반으로 게임, 게이머, 게임산업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존 미디어에서 납작하게 이해되어 온 게임을 입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후반부에선 게임 질병화부터 PC(정치적 올바름), 게이머게이트에 이르기까지 게임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들을 구체적 사례와 함께 살펴봅니다. 저자의 합리적 시각과 논픽션임에도 물 흐르는 듯한 전개가 어우러져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특히 4장 <게임은 새로운 희생양인가>와 <부록>에서는 <라스트 오브 어스 2>, '블리자드'의 위선, 여성가족부와 셧다운제 등등, 게임계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슈들이 등장합니다. 균형을 유지하면서 각각의 이슈들을 일관성 있게 읽어내는 저자의 시각이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한국 게임계가 높아진 문화적 위상에 걸맞은 문화적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저자의 비판 역시 무게감 있게 다가옵니다. 게이머가 읽어도 좋지만, 게이머는 아니지만 게임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윤태진, 김지윤 지음 | 몽스북 | 2023
"이 책의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잠시라도 고민해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게임에 진심인 젊은 남성이기도 하고, 상상 초월의 '현질'을 하는 중장년 '고래'이기도 하고, 캐주얼 게임을 잠깐씩 즐기는 남녀 청소년일 수도 있고, 폭언이나 쌍욕이 무서워서 성별을 숨기고 게임하는 '진성' 여성 게이머일 수도 있다. 즐거운 게임을 모두가 즐겁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말이다." - 책 속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만 해도 게임 세계는 젊은 남성들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게임계에서 여성의 비중이 급격하게 커졌고, 현재는 전체 여성의 73.4%(남성은 75.3%)가 게임을 즐깁니다. 게임이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즐기는 문화가 되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게임계는 격렬한 젠더 갈등의 장이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성의 진입에 따른 갈등과 논란, 변화는 게임판을 흔드는 가장 거대한 이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 문화를 연구해 온 두 저자에게 최근 게임계의 변화와 저항은 설명되어야만 하는 문화적 현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책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에서 '젠더'라는 렌즈로 게임계를 비춰봅니다. 게임과 젠더의 교차점 위에 서 있는 오늘날의 게임 문화를 "최대한 여러 시각에서 그"려 내는 이 책은 한국 게임계의 "시대 보고서"라 할 만합니다.
책은 게임하는 여성 '플레이어' 영역, 게임 속 여성의 '재현' 영역 그리고 게임을 만드는 여성 '노동자' 영역 각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그 문화적 함의를 면밀하게 추적합니다. 각각의 영역 안에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현상을 살피다 보니 책이 지루하게 느껴질 틈이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시되는 수많은 사례는 독자가 스스로 고민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재료가 됩니다. 현재의 게임 문화에 대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다수의 이론을 인용하며 이루어지는 학문적 분석도 탁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학문으로서의 게임에 눈을 뜨는 독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게이머로서 가장 눈길이 갔던 부분은 게임 속 여성의 재현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서든어택 2>의 '미야'부터 <슈퍼마리오>의 서사구조, '미연시' 장르의 변주까지, 익숙한 게임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저자들의 시선이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절묘한 통찰들이 넘쳐"난다는 김경일 교수의 추천사를 보면 이것이 저만의 경험은 아닌가 봅니다. 게임 문화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게임의 사회학
이은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매트릭스 속 가상 세계에서 깨어나 현실 세계로 나오라고 일깨운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가상 세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허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대륙이 전부라 생각했던 유럽인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계관이 확장되었듯,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지동설을 통해 생각의 틀을 깨고 우주로 나아갈 수 있었듯, 우리가 현실 세계만이 실체라는 틀을 깨고 가상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간다면 그 앞에는 기존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 책 속에서
메타버스, VR, 암호화폐, NFT까지. 가상 세계를 향한 관심은 기대와 우려, 찬사와 조롱이 뒤섞인 채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게이머들에게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게임이야말로 이미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아주 거대한 가상 세계니까요. 미국의 SF 작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했던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충분히 퍼져 있지 않을 뿐"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국내 유명 게임사에서 데이터를 분석하는 저자 이은조는 일찌감치 게임 데이터가 지닌 사회과학적 가치에 주목했습니다. 현실 세계와 유사하면서도 훨씬 정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가상 세계 연구는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게임의 사회학》에서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게임 사회학'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저자는 게임을 대상으로 한 경제, 심리, 법률 등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를 소개합니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1~3장에선 한 가상 세계를 연구해 현실의 통찰을 구하고자 한 사례들을 살펴봅니다. 팬데믹과 종말, 인센티브의 효과, 조직 경영의 핵심 요소 등 다채로운 주제의 연구들을 보며 게임 연구의 가능성과 한계를 고민해 보게 됩니다. 4~6장에서는 경제, 범죄, 윤리 등의 영역에서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연결되는 지점에 주목합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연구들은 게임과 현실은 이미 하나의 확장된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게임 속 가상 사회를 연구한다는 아이디어들은 그 자체로도 정말 흥미롭습니다. 게임의 서비스 종료가 가까워지면 폭력적 행동이 많아질까요? 가상 세계의 법은 누가 만들어야 할까요? 이처럼 책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듣고 나니 궁금한 주제의 연구들로 가득합니다. 저자의 설명이 워낙에 친절하고 상세한 터라 게임이나 사회과학 연구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읽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앞으로 더욱 확장될 가상 세계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