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을 쓴 책, 방언으로 쓰인 책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게는 고향이 삶의 뿌리처럼 느껴집니다. '나'라는 하나의 삶이 형성된 곳, 내가 가진 기억, 감정, 가치관의 기원을 찾다 보면 결국 도착하게 되는 곳, 삶이 어렵거나 반대로 행복하게 느껴질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 여러분도 자신의 삶이 뿌리내린 곳이, 즉 고향이 하나쯤은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꼭 태어나거나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내가 사는 삶에 고향이 있다면, 내가 쓰는 말에도 고향이 있지 않을까요? 말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배웠던 탯말, 즉 방언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삶을 가장 담을 수 있는 언어는 방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표준어에 억지로 맞춰 이야기하는 것보다 자신이 썼던 방언으로 대화할 때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낀다는 점을 생각하면, 내 언어의 고향은 방언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 방언은 표준어의 권세에 밀려 소멸 위기에까지 처했습니다. 방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가득하다 보니, 면접/스피치 학원에서는 방언 말투를 없애준다는 수업까지 열리는 지경입니다. 방언이 사라진다는 것은 각 방언에 담긴 지역의 역사, 문화, 정서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추억이 스며들어 있는, 내 언어의 고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방언에 대한 관심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방언을 주제로 했거나, 방언을 활용하여 쓰인 책들을 소개합니다.
표준어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표준어는 누가, 언제, 왜 정했을까요? 모든 교육을 표준어로 받고, 모든 공문서가 표준어로 쓰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들은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표준어의 사용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표준어는 "19세기 서양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국가주의(또는 민족주의)의 소산"이었습니다. 책은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표준어와 방언이 공존하고 대립해왔던 역사를 추적합니다. 근대 애국계몽운동, 일제의 식민통치와 독립운동, 광복과 근대화, 최근의 헌법재판에 이르기까지 격동하는 근현대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동했던 표준어와 지역어 간의 긴장 관계는 그 자체로 무척 흥미롭습니다. 방언을 둘러싼 정치사회적인 맥락은 물론 문화적인 맥락도 깊이 있게 다뤄 다양한 층위에서 둘의 관계를 조망합니다.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학문적 엄밀성을 갖췄으면서,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들을 소개해 찾아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언어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방언은 그 자체로 연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한국어는 한국에 존재하는 개별 방언들의 총체"임을 생각하면 "방언학은 곧 국어학"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랜 기간 방언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정승철 교수가 모두를 위한 '방언학개론'을 펴냈습니다. 책은 방언과 방언학의 정의와 역사를 다루는 총론부터 구체적인 방언 조사방법론, 방언의 분포와 변화를 다루는 각론과 언어와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사회언어학까지 방언 연구의 세상을 폭넓게 소개합니다. 학문적 체계성을 갖춘 구성과 다양하고 적확한 예시들이 특히 돋보입니다. 방언학 교과서로서 쓰인 책이지만 설명이 난해하지 않아 일반 독자도 교양서로서 충분히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방언학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분야다 보니 그 자체로 무척 흥미롭기도 합니다. 국어학이나 언어학을 전공한 방언학도는 물론, 방언을 깊이 있게 파보고 싶은 모든 분들께 추천합니다.
'툴렁이'는 무엇을 부르는 말일까요? '다신어매젖줄개'는 또 무슨 말일까요? '톰발리', '쉐우리', '샤쓰개'는 아예 외국어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지역어 연구자인 이길재 교수가 주옥같은 방언 어휘들을 찾아내 하나의 책으로 묶어냈습니다. 책은 마흔일곱 개의 단어 속에 담긴 개개인의 삶, 민족의 역사, 공동체의 문화를 끄집어내 소개합니다. 생소하기만 한 사투리들의 말뿌리를 함께 좇는 과정은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지적 흥미를 자극합니다. 하나의 단어와 관련 있는 다양한 어휘와 사회언어학적 지식을 함께 설명해주니 한국어 전반을 더 깊이 있게 알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 남쪽은 물론이고 이북 지역, 중국의 조선족 사회,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사회에서 사용하는 방언까지 '한국어'에 속하는 모든 언어문화를 다룬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목차를 보고 마음 가는 단어들부터 찾아 읽어가다 보면 언어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방언의 힘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방언은 우리의 언어 문화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지역의 역사와 정서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나 방언의 가치를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으로 체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남 영암 출신의 조정 시인은 어릴 적 할머니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사투리 그대로 시로 옮겨 시집을 냈습니다. "죽음보다 깊은 비극을 겪고, 삶보다 넓은 희극을 사는 이들의 옛날이야기"들이 서남 전라도 방언에 담겨 고유한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정감 있는 구어체로 쓰인 서사시들을 읽다보면 어두운 내용 속에서도 유머가 감돌고, 기쁜 상황에서도 역사의 상흔이 느껴집니다. 주제의 폭도 넓어서 태어나 나이 들어 죽는 인생 이야기부터 비극의 근현대사, 달콤쌉쌀한 사랑과 결혼 이야기, 이웃과 보내는 안온한 일상, 그일상을 흔드는 사회 변화까지, 영암 할머니들의 희로애락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울고 웃으면서 시집을 읽다 보면 방언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전라도 말은 살아있다"는 시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방언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이 책만큼은 꼭 한번 읽어보시라 추천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