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담론의 근원과 문제인식
어느 순간부터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친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단어 그대로 현재 사는 대한민국이 '지옥'과도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헬조선'은 '지옥불반도' 와 같이 현재 살고있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 담긴 자조적인 목소리이다. '헬조선'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면 당신도 어느새 지옥살이에 꽤나 적응한 것이다. 만약 여전히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그대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면? 그렇다 당신은 여전히 살만한 모양이다.
이와 동시에 헬조선에서는 '수저계급론'이라는 키워드 또한 등장했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liver spoon in one's mouth)'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수저계급론'은 쉽게 말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능력으로 사회적 위치가 계급화 되는 현 상황을 일컫는다. 온라인에서는 '흙수저 빙고'게임 등의 자신이 무슨 수저인지 검사하는 아주 통찰력 있는 분석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 폐지되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신분제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수저계급론'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특히 젊은 층에서 만연하고 있는 '자국비하' 문화는 사실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이 문화의 근원은 젊은 세대의 '절망'이다. 분명 학창시절에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된다고 배운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답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답이 있고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다행인데 애당초 답이 없어 보인다. 교과서는 우리에게는 무한한 능력의 가능성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었지만 경험은 우리에게 그 반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불합리함과 부조리로 가득한 '지옥'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헬조선'이라는 키워드가 단순한 자국비하의 의미에서 현 사회 그 자체를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될 수 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절망'을 느끼고 인식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모두가 힘든 것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지옥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헤븐조선'이다. 사실 '헤븐조선'이라는 단어는 '헬조선'을 비꼬는 반어법적 용어인데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이곳이 천국인 것 같다.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을 드러내는 키워드가 바로 '수저계급론'인 것이다. 노력을 넘어서는, 혹은 모든 노력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 존재가 있다.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대한 절망감과 태어나는 순간부터 계급화 되어가는 이 현실을 우리는 은연중에 느끼고 받아드리고 있다. 소위 '잘사는 집'에 대한 부러움은 예전부터 존재했겠지만 그것에 대해 무작정 동경하거나 나아가 분노하지 않았던 것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보다 절망이 커져가는 이 사회 속에서 그러한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참 염치도 없는 것이다.
살기는 점점 힘들어 지는 것 같은데 TV와 신문에서는 항상 국가와 기업들의 위대한 성취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매스미디어는 헬조선 담론을 그것이 반국가적이고 반체제적인 관점이라고 정의하는 듯하다. 헬조선에 관한 담론들은 어떠한 진보와 발전도 불가능한 패배주의적인 마인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힘든 삶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희망을 품기는 커녕 오직 '비판 아닌 비난'만 하는 것, 이것이 매스미디어가 보는 헬조선 담론의 실체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노력을 하라고 외친다. 헬조선? 이곳이 지옥이라면 천국으로 바꾸도록 노력! 을 하라고 누군가는 외친다. 국가에게 원하지 말고 네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어떻게 이 아름다운 강산을 지옥이라고 묘사할 수 가 있는가? 어떻게 세운 나라고 어떻게 발전해 온 조국인데! 지옥이라니! 매스미디어는 자국을 비난하는 '헬조선'이라는 표현의 과격성을 부각한다. 비난도 정도가 있다는 것이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이렇게 단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한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겠는가? GDP기준 11위, 1당 국민소득 3만을 바라보는 위대한 나라가 지옥이라니 참 기가 차는 표현이다.
동시에 매스미디어는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사회의 탓으로만 돌리는 개개인의 나약함을 꼬집는다. 이 사회가 부조리한 것은 사실 개개인의 문제이지 그 탓을 국가에 돌리면 안 된다는 것. 자, 이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된다. 왜? 그것은 국가의 잘못이 아니며 불평한들 바뀔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노력을 해야 한다. 사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요즘 젊은것들은 너무나도 나약해서 그저 나라탓 사회 탓만을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보다 못사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불평불만할거면 차라리 다른 나라에 가버리라고 누군가는 얘기한다. 아프리카 같은 곳에 태어나야 정신을 차린다고 말이다.
또한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왜 우리엄마가 수저로 불려야 하냐'면서 울분을 토했다. 심지어 몇몇 미디어들은 이를 기사화했고 그곳에 달린 댓글에는 '수저계급론'에 대한 비난과 '부모님 사랑합니다'라는 눈물 없이 못 볼 광경들이 이어졌다.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고작 경제적 조건으로 나누고 '수저'라고 부르다니.. 이 얼마나 패륜적이고 근본 없는 것인가? '누구는 흙수저, 누구는 금수저, 우리 이러지 말고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가자!' 라고 그들은 외친다. 이제 '수저계급론'은 부모의 사랑을 오직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자본주의의 폐해이며 '잘못된 관점'으로부터 비롯된 표현으로 간주된다.
그러니까 우리 금수저니 은수저니 하는 말 쓰지 말자. 부모님 경제수준 탓하지 말고 다 같이 노오오력을 해야지! 불평만 하면 세상이 바뀌는가?
매스미디어는 놀라운 파급력을 지닌다. 그리고 이 놀라운 파급과정에서 문제의 본질은 항상 왜곡되기 마련이다. 헬조선의 담론의 핵심은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현실'에 있다. 사실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다. 죽을 만큼 노력해봤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영양분을 공급받고 호흡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살아가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은 '지옥'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한 환경으로는 부족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수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것은 죽어가는 것일까?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을 꿈꾸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것, 즉 '진보'를 의미한다. 우리가 보수, 진보를 나눌 때 그런 진영논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더 나은 수준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삶의 목표로 꿈꾸는 것이 쾌락이든 사랑이든 혹은 물질적 성공이나 명성이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살아감'이라고 할 수 있다. 노예의 삶은 왜 진정한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까? 그것은 자유롭게 꿈꿀 수 없으며 꿈을 꾼다하더라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헬조선 담론에서, 담론의 주체 스스로가 자신들을 '노예'로써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헬조선은 절망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꿈을 꾸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먼저 떠오르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필연적으로 노예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헬조선 담론은 국가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아무 이유도 없이 행해지는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이 아니다. 사회의 경쟁에서 패배한 패배자들의 푸념 또한 아니다. 헬조선 담론은 여전히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현 젊은 세대는 누구보다도 죽을 만큼 노력한 세대이며 동시에 그만한 대가를 가장 받지 못하는 세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와 국가를 만든 주체는 그들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억울하고 비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의 세대들에게 끊임없이 강요되는 노력은 일종의 환상과도 같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더 이상 어떠한 효력도 갖지 못하고 심지어 환상조차 주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노력의 주체 스스로가 자각하기 때문이다. 계층 간의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한, 노력에 비례하는 결과와 대가가 점차 줄어드는 이 상황은 노력 그 자체마저 불신하게 되는 자조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수저계급론'은 이와 같은 현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수저계급론은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저계급론이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물질화 한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이다. 사회 구조자체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는 수저계급론을 마치 그것이 부모의 무능력함을 표현하는 것인 것 마냥 해석하고 갑자기 뜬금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외치며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이해력의 결여이며 혹은 불합리함을 보고 애써 눈을 감는 것이다. '부모님을 가치화 하는 것이 불편하다'라는 헛소리를 더 이상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단 한번이라도 현상의 근원을 생각해보려는 철학적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문제인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다. 첫째로는 문제를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왜곡하는 수많은 요소들 때문이며 둘째로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면서 찾아오는 괴리감으로 인해 스스로가 이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를 부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는 구성원이라는 점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는 '자기부정'은 모든 혁신과 발전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담론들로 부터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자국비하 아닌 애써 외면하던 문제인식, 바로 이것이다.
매스미디어는 오직 표현의 과격성과 그 현상의 모습만을 집중하며 정작 현상들이 근거로 하고 있는 본질을 외면하고 나아가 의도적으로 왜곡하였다. 본질이 왜곡된 담론은 필연적으로 그 힘을 잃게 된다. 이는 문제인식의 가능성이 점차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여 나아가 문제해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왜곡된 본질을 바라보는 많은 대중들, 즉 문제를 문제로써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은 궁극적으로 사회 근저에 작동중인 문제와 이를 표현한 담론자체를 매몰시킬 것이다.
잘못된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을 인식하고 해결하려 하는 것은 결코 반체제적인 의식이나 활동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을 발전시키고 혁신하려는 인간의 고유한 의지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상을 걷고 그것이 지시하는 실재를 보아야 한다.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드리며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서 부터 도출되는 이질감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더 긍정적이고 '지옥'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00m 달리기는 누구에게나 힘들다. 운동화를 신었든 짚신을 신었든 맨발로 뛰든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건 맨발로 뛰는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노력을 통해 계속 달리다보면 굳은살이 생겨서 전보다는 나아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애당초 운동화를 신고 뛰는 사람은 그러한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작금의 상황은 운동화가 아니라 심지어 자동차를 타는 사람이 맨발로 뛰는 누군가에게 '적어도 노력은 해야 되지 않냐?'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수저계급론과 헬조선 담론은 단순한 자국비하를 넘어선, 뼈아픈 현실을 말하고자 하는,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담론들이 그저 패배주의적 마인드나 낙오자들의 변명이 더더욱 아닌 것이다.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진정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 이것이 헬조선 담론의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매스미디어가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현실자체를 인정하고 동시에 부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궁극적인 문제해결의 출발점일 것이며 헬조선담론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