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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얕덕 Oct 27. 2024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위로가 되는 순간

카테고리: 윤하 - 사건의 지평선

2009년 5월 24일

내가 처음으로 연예인의 사인을 받은 날짜다


내 인생 첫 연예인 덕질은 가수 '윤하'였다.


2006년 인간극장 에피소드와 블리치 OST '혜성',

2007년 1집 '비밀번호 486',

2008년 2집 '텔레파시'를 거치며 점점 스며들다가

2009년 3집 '1, 2, 3'를 기점으로 '입덕'을 했다.


팬카페(홀릭스)에 가입하고

앨범 사인회에도 참여하는 등

나름 열정적인 덕질을 이어갔다.


특히 사인회의 기억이 굉장히 생생하다.


원래 사인을 받고 악수까지 하는 행사였으나

나는 시간 관계상 악수를 받지 못했고,

'혹시 악수 한 번만 할 수 있을까요?'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내내 눈물을 흘리다가

팬카페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회원들로부터 위로받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뜨거웠던 덕질의 열정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그라졌고,

2012년 앨범 'Supersonic'을 마지막으로

나는 오랜 '휴덕' 기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러 2022년,

'사건의 지평선' 축제 라이브 영상을 시작으로

'윤하 역주행 신드롬'이 일어났다.


각종 음악방송과 예능을 종횡무진하며

가수 윤하의 대중적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


15년 차 '올드 덕후'로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해야 할 상황임에도,

나는 한동안 윤하의 노래를 듣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윤하를 포함한 모든

'그 시절 추억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흔히들 노래를 들으면 그 시절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윤하의 노래를 생각하면

그 시절의 흑역사가 자꾸 떠오르곤 했다.


소심하고, 염세적이고,

거친 욕설을 입에 달고 살면서

비뚤어진 사고관까지 가지고 있던 시절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묻어두고 싶었고,

부족한 시절의 기억을 자꾸 끄집어내는

최애 가수의 노래를 애써 멀리했다.


결국 '사건의 지평선' 신드롬이 시작된 

가량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용기를 내어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나는 예상치 못한 큰 위로를 받았다.


윤하의 노래 '사건의 지평선'

6집 리패키지 앨범인

'END THEORY : Final Edition'의 타이틀 곡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을

내부의 사건이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블랙홀 주변의 경계선인

'사건의 지평선 (Event Horizon)'에 비유한 노래다.


과거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슬픔의

메시지가 담긴 이 노래를 통해,

나는 오히려 작은 위로를 받았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과거로

나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위로 말이다


지금까지도 문득 떠올라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너무나도 부족했던 나의 과거는,

이제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다.


그때의 모습은

지금의 나로 성장시켜 준 밑거름 정도로

고맙게 여기며 떠나보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이 노래를 듣고 난 이후,

나는 더 이상 '추억의 노래'를 듣고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중략)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윤하 - 사건의 지평선' 중

추억과 흑역사의 공통점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라는 것이다.


그것이 슬프게도 느껴지는 한편,

때로는 그것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때의 나는

이제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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