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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멀리스트 상희 Dec 09. 2020

남편의 세 개의 서랍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마세요


미니멀 라이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미니멀 라이프는 나 혼자 시작했지만 결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작은 혼자였기 때문에 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사는 가족의 도움 없이는 미니멀 라이프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혼자만의 비우기만으로도 벅찬데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들의 물건으로 답답하고 화가 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 가족의 물건은 포기하고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인정해주거나 아니면 치열하게 싸워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데 둘 다 쉬운 일은 아니다.



추억이 소중하지만 잘 비워내는 여자와 추억이 소중하지만 잘 비울 수 없는 남자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는 추억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지만 잘 비우는 사람이고 신랑은 추억을 소중히 하면서 잘 비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 둘의 비움의 기준도 너무나 달랐다. 소중한 물건을 대하는 각자의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전공서적도 전부 비워냈고 학창 시절 졸업앨범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것들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것이 옳거나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조금 더 가벼워지고 싶었고 과거가 아닌 현재를 선택했으며 현재를 살고 싶었다. 소중한 추억이 물건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무게를 줄여봅시다.

나는 '내가 가진 짐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추억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해서 많은 짐을 가지고 사는 신랑을 보면 신랑은 짐의 무게만큼이나 인생의 무게도 무거워 보였다. 그런 신랑의 인생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신랑은 원하지 않았지만 나는 도저히 포기가 안돼서 치열하게 합의점을 찾기로 했다.



내가 미니멀 라이프를 하면서 정말 힘들었던 건 나의 물건 이외에 통제되지 않는 가족들의 물건이었는데 신랑은 비우고 싶지 않지만 나는 비우고 싶은 물건들 사이에서 오갈 데 없는 물건들이 자꾸 밖에 나와있어서 서로에게 스트레스였다. 신랑은 비우고 싶지 않다고 매일 하소연을 했고 나는 매일 비워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하소연과 잔소리의 합의점으로 신랑의 서랍을 정해주기로 했고 나는 절대로 열어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우리의 합의점은 세 개의 서랍.

우리 집에는 신랑의 세 개의 서랍이 있다. 우리가 찾은 합의점이 이곳에 있다. 집이 작아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자기만의 서랍으로 마음 편하게 자기의 물건을 지킬 수 있는 신랑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나에게 '서랍 세 개' 이 공간을 절대로 열어보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다.




첫 번째 서랍.

신랑이 제일 필요로 했던 공구 서랍은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서랍장을 내어주었다. 이 공간은 나도 종종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절대 열어보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킬 수 없지만 절대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지키고 있다. 열 때마다... 할 말은 많지만 넣어두었다.





두 번째 서랍.

우리 집 주방에서는 수납 서랍이 많이 있는데 이중 가장 낮은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신랑의 취미용품을 넣어두는 서랍이 하나 있다. 신랑은 칼 가는 게 취미인데 이곳은 숫돌과 칼 가는데 쓰이는 용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열어 볼일이 없어 어떤 용품들이 들어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나 신랑의 소중한 서랍 중 하나이다.





세 번째 서랍.

작은방에도 신랑의 서랍이 하나 있다. 신랑의 세 번째 서랍이다. 내가 버릴 거냐고 물어보면 일단 이 서랍으로 들어간다. 그 서랍에서 방치되거나 어떤 용도로 다시 쓰이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이 서랍이야 말로 판도라의 상자임으로 절대 열어보지 않는다. 내가 탐탁지 않아했던 대부분의 물건이 이 서랍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서랍이 우리의 평화를 지켜주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또 다른 개인 공간

그리고 신랑에게는 또 다른 개인 공간이 있다. 바로 회사다. 서랍에 들어가기엔 애매한 물건들이 있는데 나는 비우겠다고 했고 신랑이 보기엔 아까운 물건들은 전부 신랑이 회사로 가져간다. 나의 손이 뻗치지 않는 아주 안전한 개인 공간인 것이다.


추억을 소중히 하면서 버리지 못하는 남자와 아무것도 없이 살고 싶은 여자는 이렇게 서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자기 물건의 애착은 강하지만 비우기를 아주 잘하는 7살 아들도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의 물건을 비울 때는 항상 물어보고 비운다. 안 그러면 귀신같이 찾기 때문이다.


나, 신랑, 아들 한집에 셋이 살고 있지만 모두가 물건을 대하는 방식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부디 물건이 아닌 나와 우리 서로에게 집중하는 삶이고 물건이 아닌 마음을 채우는 삶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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