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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더언니 Sep 03. 2015

완전한 절망은 새로운 시작의 문이다.


#

스물 일곱.

​나는 길을 잃었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모든 그림,

​그 것은 어느 날 날아든 작은 돌맹이 하나에 산산조각 깨져버릴 수 있는 얇고 가벼운 유리와도 같았다.


‘나’는, 나만큼은 다르리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사실은 별 수 없는 평범한 하나의 여자였다.

졸업을 하고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그렇게 알콩달콩 사는 인생의 정석을 밟고 있었던 나에게, 갑자기 모든 것들이 눈 깜짝할 새에 없어져버렸다.

 


스물 여덟.

나는 길을 잃었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내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되자,

나는 열심히 애쓰며 노력하며 사는 삶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내 노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는지,

내가 나름 고르고 골랐던 사람이 결국 ‘이따구’ 였는지,

내가 계획한 인생이 얼마나 초라한 것이었는지 철저한 절망을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더 열심히 노력해봐, 그럼 될거야.’ 라는 말은 솔직히 멍멍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치며 애를 써도, 안 되는 때가 있다.

 

그 때가 그랬다.

 

나름 몇 개 국어 하는 고급인력(?) 으로써, 아무데나 들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자존심이 바닥을 친지는 오래였고,

​동네 편의점 알바라도 해야지 하고 가보면 어제 바로 사람이 구했다고 할 정도로,

​내 삶에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긍정적 사고’라는 것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것보다는 물론 좋겠지만,

​마냥 ‘긍정적’인 것은 사실 좋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가 만약 마냥 ‘초긍정’ 마인드였더라면,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으아니! 쥐엄열매라도 먹을게 있는게 어디야!’하고 감사하는 캐릭터였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해피엔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쥐엄열매를 꾸역꾸역 먹다가

‘그 마저 주는 이가 없어지니..’ 완전한 절망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 완전한 절망 끝자락에서 탕자는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을 기억한다.


탕자의 터닝 포인트였다.

 

 


 

#
​그렇게 모든 것이 엎어지고, 없어진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던 ‘대학원’이라는 기회.

 
느려터진 프랑스와 인도의 행정과 촉박한 원서 데드라인이 맞물렸어도,

결국 ‘합격통지서’라는 원본이 없이 출국을 했었어도,

당장 거할 곳도 없고, 내년 학비가 채워질지 아닐지 알 수 없어도,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어도,

 

될 일은 된다.

 
나는 지금 상해에 와있다.

전보다 더 큰 감사와 행복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고 있다.

 

 

#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Hi, how are you?

When did you come to Shanghai?

What brought you here?

Are you working or studying?

  
이런 두 세 마디의 형식적인 인사 후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떠돌아 다녔던 나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인도에서 5년을 살다가 다시 상해로 왔어. 나는 상해가 너무 좋아' 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람들은 "WHAT??" '잠시만, 뭐라고? 인도에서 5년을 살았다고??' 라며 반문한다.

놀랍다는 그들의 반응이 이제는 익숙해져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다음 말을 이어간다.

사람들이 흔히 인도에 대해 가질법한 신기함이나 환상을 낱낱이 깨주는 것이 마치 나의 사명인 듯이 인도의 단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사실, 상해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겪었던 그 수 많은 ‘인도의 단점’을 통해 많은 절망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 절망으로 인하여 더 감사할 수 있는 내가 되었고,
​​매일 마주치는 어느 한 순간도 우연이 없고 만나는 사람들도 우연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하이가 그토록 좋은 이유는 완전한 절망 뒤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게 하는 작은 문이었기 때문이다.

​내 뜻대로 안될 때엔 내가 하던 ‘열심히’를 멈추고,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폭풍이 잠잠히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어떤 절망이 내게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이젠 어린 스무 살 때처럼 마냥 방황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행복을 선택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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