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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Jan 15. 2023

초대합니다-강북구 5

서울 25개 구 길 위의 역사-구경(9경) 시리즈 

어찌 돈을 받을 수 있겠는가


1910년 나라를 잃은 해의 겨울, 60여 명의 사람들이 북풍이 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너갔다. 이회영의 6형제와 그의 일가였다


'삼한갑족'

나라 안에 최고의 가문이란 뜻이다. 조선후기 10명의 정승을 배출한 가문 이회영의 가문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회영은 형제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 가문을 두고 공신의 후예로나라의 은덕이 이 시대에 으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 형제는 나라와 더불어 안락과 근심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그리고 6형제는 알짜배기 옥토, 금싸라기 부지의 토지 등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돈이 당시로는 40만 원, 현재 가치로 600억이나 되었다. 


전 재산은 서간도의 독립군기지 삼원보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그곳에 신흥강습소가 세워지는데, 후에 독립운동사에서 길이 남을 자랑스러운 학교 '신흥무관학교'가 된다. 


이회영의 바로 아래 동생, 이 집안의 다섯 째가 이시영이다.  


(사진) 강북구 초대길 - 북한살둘레길 제2길 중 초대길은 초대 부통령 이시영, 초대대법원장 김병로, 초대 검사 이준열사의 묘소로 이어지는 길이다. 


" 나라를 되찾으려고 싸우려는 이들에게 어찌 돈을 받을 것인가!"


신흥무관학교는 무료로 운영되며 1920년까지 10년 간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으며,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의 핵심간부로 활동한다.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과 단원 70여 명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전 재산을 다 내놓은 6형제는 압록강을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아 빈털터리가 된다. 그리고 중국 땅에서 굶어 죽거나 병사하거나 옥사해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한다. 유일하게 살아서 조국 땅을 밟은 이는 이시영 한 사람뿐이었다. 



아는가, 국민방위군 사건


이시영은 대통령 이승만조차 '성재(이시영의 호)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해방 공간에서 최고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실천한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시영은  삼한갑족 가문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고,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였다. 일제 강점 후 조선총독부의 회유를 받아들여 부귀영화를 쫓아갔다면 누구보다 부유하고 호화롭게 살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시영은 형 이회영의 말을 좇아 왜적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대의를 지키며 살았다. 가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는 동안 아내가 과로로 죽고, 두 아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으나 돌보지 못했다. 형제들은 이국 땅에서 병사, 아사, 옥사로 세상을 떠났는데 관을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꺾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들이 상해공항에서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 화환을 두른 이 가 김구, 오른쪽 중절모에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이시영, 가장 왼쪽이 김규식이다. (자료사진 : 위키백과


이시영은 김구와 더불어 대표적인 임시정부 수호자였다. 임시정부요인들과 1945년 12월 6일 귀국했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1년 부통령 자리를 내놓는 사표를 던진다.  '국민방위군 사건' 때문이었다. 부통령 이시영이 책임을 통감하며 물러난 사건을  살펴본다. 


국민방위군 사건


때는 6.25 전쟁 중.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1.4 후퇴가 시작되었다. 이 즈음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는 퇴각지역에서 17~40세 청장년 남성을 소집 또는 징집한다. 남겨진 이들은 적의 병력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리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총 50만 명이 징집, 소집됐다. 이들을 국민방위군이라 한다. 


그런데 창덕궁에서 출발한 국민방위군은 총도 들어보지 못한 채 약 10만 명이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또 20만 명이 동상과 부상으로 폐인이 되거나 팔다리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1950년 12월부터 시작된 혹독한 겨울, 약 100일 동안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당시를 리영희는 이렇게 증언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그 겨울에 일어난 것일까?


국회의 '진상조사위원회'에 따르면 국민방위군 예산 209억 830만 원 중 72억 원이 부정하게 처분되어 횡령, 착복당했다. 밝혀진 액수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횡령한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자동차 250대 구입, 실제는 20대만 구입했다. 명태 386만 짝 구입, 실제는 4천 짝만 구입했다. 병사의 인원수를 허위보고해 23억 5천만 원을, 양곡을 횡령해 20억 4천만 원을, 공금을 횡령해 28억 8천만 원을 가져다 '사적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웠다. '가마니로 돈을 빼돌리는' 횡령과 착복은 장관부터 사령관, 하급장교, 부하들까지 층층이, 단계별로, 아주 촘촘하게 이루어졌다. 심지어 대통령의 정치자금으로도 흘러갔다. 


국민방위병은 전쟁터가 아닌 교육대로 가는 도중 혹독한 추위에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다쳐서 죽었다. 한 겨울 한파에 서울에서 부산, 제주도 교육대로 가는 그들에게 홑 겹의 군복과 조금의 주먹밥, 소금국만 제공되었다. 그 결과 그나마 산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폐인이 되거나 동상으로 수족을 잃었던 것이다. 


초대부통령 이시영-국민방위군사건을 책임지며 사표를 던진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면 위임받은 권력과 정부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국민방위군 예산은 시작부터 횡령과 착복의 길을 열어놨다고 봐야 한다. 구체적 항목과 시행지침없이 '국민방위군 예산'이라고 턱 던져 놨기 때문이다. 구체적 항목에 따른 시행지침없으니 집행의 책임이 모호했다. 이런 것을 흔히 '눈먼 돈'이라고 한다. 각 부처는 박 터지게 싸워가며 예산을 따가서 상층에서부터 말단직원(부하)들에 이르기까지 알뜰하고 살뜰하게 해 드셨던 것이다.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부통령직을 내던지며 이시영은 성명서를 읽어간다. 그가 대구, 경주, 울산을 돌며 보았던 국민방위군의 모습은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헐벗은 사람, 그나마 입은 옷도 갈기갈기 찢어졌고, 굶주려 뼈만 앙상한 사람들. 대참사가 일어났지만 나서서 책임지는 인물은 없었다.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며, 국회에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자 대통령이승만과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진실을 덮으며 위원회 활동을 방해했다. 


35년 남의 나라 땅에서 망명객으로 살았던 이시영에게 이런 대한민국의 현실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이시영은 부통령으로서 책임지고 사표를 던지며 부정부패한 정부와 관련자들에게 일갈한다. 

"시비를 논하던 그 사람조차 관직 위에 앉게 되면 더러운 물에 휩쓸리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이시영이 물러나자 대통령 이승만은 마지못해 국방부장관 신성모를 해임했다. 꼬리 자르기로 담당자 5명을 일찌감치 처형함으로써 사건은 무마되고 밝혀야 할 진짜 진실은 묻히고 말았다. 


이시영 묘소 - 오르는 길이 가파르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분들이 걸었던 험난한 길만 할까 생각하며 거뜬하게 올라 인사를 드리고 뒤를 돌아본다. 올라온 길이 아깝지 않다. 

 

2022년 10월 29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대참사가 일어나 159명의 피지도 못한 생명이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시영 초대부통령처럼 스스로 책임을 통탄하며 사죄하는 정부책임자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쓸쓸한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편


이시영 둘째 며느리 서차희여사는 이 무허가주택에서 살며 이시영묘소를 돌보다 2013년 돌아가셨다 


근현대사기념관 정문에서 뚫린 통로 너머에 '초대길'을 따라가면 이시영묘소가 나온다. 이시영묘소를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오르기 전에 앞 쪽에  '사랑의 집'이란 작은 팻말이 붙은 허름한 집을 꼭 돌아본다. 이곳은 이시영의 둘째 며느리 서차희가 살았던 집이다. 


서차희는 이시영의 둘째 아들 이규열과 혼인한다. 결혼식은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렸고,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사회를 보았다. 하객만 3천여 명이었으니 상당한 액수의 축의금이 모였을 것이다. 이시영은 당시 일제에 쫓기던 몸이라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 축의금 모두를 가져간다. 그리고 전부 독립자금으로 쓴다.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에게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형님, 옛 재산을 찾아줄까요?"라고 했다. "내가 재산 찾자고 독립운동한 줄 아느냐"며 이시영은 호통을 쳤다고 한다. 생을 마칠 때까지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독립유공자이자 초대부통령은 후손들에게 가난을 남기고 갔다. 이시영의 묘소를 돌아가실 때까지 돌봤던 며느리 서차희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다가 104세로 돌아가셨다. 


광복군 합동묘소 터

이시영묘소를 오르거나 내려올 때 꼭 잊지 말고 찾을 곳이 있다. 바로 이 광복군 전사상이다. 


광복군 전사상이 있는 이곳 광복군 17위가 안장되어 있었다. 대개 20대 미혼에 순국 후손조차 없었다. 광복군 동료들이 유골을 수습했다가 해방이 되자 모시고 귀국했으나 찾아가는 후손이 없어 22년 동안 땅에 묻히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광복군 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이 수유리로 안장되면서 광복군 17위도 이곳에 모셨다. 그러나 모두 이제 이곳에 없다. 


지청천은 1994년 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광복군 17위는 2022년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제 자리를 찾게 됐다. 


초대합니다-초대길 안내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북한산국립공원 수유분소가 나온다. 수유분소 왼쪽을 보면 계곡으로 이어진 길이 나오는데 계곡을 넘으면 '초대길'이다. 초대길은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묘소-초대대법원장 김병로묘소-초대검사 이준열사묘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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