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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Jan 20. 2023

거리의 변호사를 찾다-강북구 6

서울 25개 구 길 위의 역사 - 구경(9경) 시리즈



산산이 부서진 종로경찰서의 유리창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긴장감이 흘렀다. 

누군가 폭탄을 투척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서측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조용하지만 신속하게 주모자와 배후를 쫓고 있었다. 투척된 폭탄은 프랑스제 F1으로 이전에 투척된 폭탄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성능과 위력이 폭발적이었다. 비밀스럽게 주모자를 추적한 결과 주모자는 '김상옥'이며 폭탄을 제조해 제공한 배후는 '의열단'이란 결론을 내린다. 

 

“처참한 현장 광경, 산산이 부서진 교통실 유리창, 가공할 위력의 폭탄.”


이틀이 지나서야 폭탄 투척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후인 17일, 서울 남산 아래 후암동 일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상옥이 여동생 집에 숨었다는 밀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일경의 체포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폭탄투척 10일 후인 22일, 효제동에서 다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경찰 무려 1천 명이 동원됐다. 3.1 운동 이후 최대규모였다. 일본경찰은 김상옥이 숨어있다는 외딴집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갔고 김상옥은 육혈포 쌍권총을 쏘며 맞서 16명에게 총상을 입혔다. 무려 3시간 동안, 치열한 접전이었다. 김상옥은 남은 한 발의 총탄으로 자결하며 생을 마감한다. 향년 34세였다. 


의거를 일으킨 김상옥은 생을 마감했지만 일본경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겨우 3년,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작은 움직임에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성(서울) 한복판에서, 조선총독부의 심장 인 종로경찰서에 감히 폭탄을 투척하다니. 게다가 이번 폭탄의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앞으로 의거를 뿌리뽑겠다는 생각으로 일경은 관련자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종료경찰서-(자료사진 : 위키백과) 조선총독부 산하 종로경찰서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탄압기구였다. 독립투사를 피체하여 참혹하게 고문하던 가장 대표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병상에 누은 대로 이혜수 양 공판"



1923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정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김상옥의사를 숨겨진 이혜수의 재판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재판이 시작될 즈음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들 것에 누운 피고가 '병인마차'에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재판정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들것에는 한 처녀가 실려 있었다. 그녀는 판사가 묻는 말에 신음에 가까운 소리만 낼뿐이었다. 머리맡에서 여동생이 쪼그리고 앉아 언니의 대답을 듣고 전달해야 했다."

-1923년 12월 26일 <동아일보>


들것에 실려 나온 피고는 이혜수였다. 처참한 피고의 모습은 다음 날 신문에 실려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한 사람을 저토록 참혹하게 고문해 가둔 일본경찰과 몸도 가누지 못한 환자를 재판정에 세운 법원에 비난여론이 쏟아졌다. 비난여론을 의식한 재판관은 이혜수에게 1년 선고을 내렸고, 얼마 후 석방했다.   


이 재판을 승리를 이끈 변호사는 김병로였다. 피고 이혜수를 구하기 위해 '병인마차'를 태워 재판정에 세우면 침상에 누워 신음하는 피고를 보고 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이것을 이용해 재판관을 압박하자. 김병로의 작전은 적중했다.  




해방 후 김병로는 초대대법원장이 된다. 어느 날 백발의 노인이 면회를 왔더란다. 만나보니 이혜수였다. 출옥하고 몸은 나아졌지만, 온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가난 속에 산다고 했다. 정부에 서민주택을 신청하려고 하는데 김상옥의사와 관련되었다는 증명서를 써달라고 부탁하러 왔던 것이다. 이혜수는 김상옥과 이웃하며 살며 어렸을 때부터 가까웠던 사이였다. 김상옥이 상해로 가기 전에 종로구 효제동을 중심으로 혁신단을 조직해 비밀리에 활동하던 때, 혁신단 단원이기도 했다. 


김병로 묘소로 가는 길 - 북한산둘레길 '초대길'은 근현대사기념관 옆 '국립공원북한산수유분소'에서 찾아가면  이시영선생묘역-김병로선생묘역-이준열사묘역까지 이어진다.




거리의 변호사 김병로



김병로의 호는 '가인(街人)'이다. 거리의 사람이란 뜻이다. 


일제강점기 판사를 그만두고 그는 변호사가 된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아무리 일본 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법정에서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할 수 있다.


그는 말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 나선다. 1923년 변호사 6인이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한다. 그들은 변호사 1인의 보수로 무료변론, 독립투사들의 옥바라지, 그 가족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일제강점기 '3대 인권변호사'로 꼽히는 이인, 허헌이 이 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한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소위 '문화정치'를 실시하지만 한편으로 '사상사건'과 '사상범'이 늘어났던 시기였다. 검거와 기소의 근거는 <치안유지법>이었고, 그 법의 근간이 현재 <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진다.  


그를 거쳐간 변론은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일제강점기 굵직한 사건과 맞닿아 있다. 암태도 소작민들의 소작쟁의, 원산 노동자들의 원산파업, 광주학생운동, 6.10 만세운동 등 1백 건이 넘는다. 변론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실력을 기르는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그리고 1927년 사회주의계열의 '좌'와 민족주의계열의 '우'를 통합한 신간회에도 참여해 활동했다. 


김병로선생 묘소로 오르는 길- 묘소는 길가에 있다.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오르면 초대대법원장이자 사법부의 수호자 김병로를 만나게 되는데, 저 몇 안 되는 계단을 오르는 이는 적다

   


요즘 사법부 잘 계시는가



"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

대통령 이승만이 법무부장관에게 김병로의 안부를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해방 후 김병로는 국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대법원장에 임명될 정도로 사회적 신망이 높았으나 대통령 이승만은 매우 껄끄러워했다. 


김병로는 친일파 척결에 진심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자조사특별위원회'를 와해시켜 버린다. 또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시시때때로 고친다. 전쟁이 한창인데 자신의 당선에 불리하다고 간선제(간접선거:당시는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를 직접선거로 바꿔버리는 개헌(헌법개정)을 강행해 버린다. 그리고 반대하는 국회의원은 정치깡패와 경찰을 동원해 잡아들이고 기소했다. 근거는 '국가보안법'이었을 것이지만, 재판을 담당한 김병로의 사법부는 그들을 석방시켜 버린다.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


김병로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집권을 위해 헌법을 유린하는 '폭력적 집권자'를 막기 위해 끝까지 두 가지를 지키고자 했다. 하나는 '헌법의 가치'요, 또 하나는  '사법부의 독립'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이승만이 김병로를 안부를 물으며 '헌법'이라고 했던 것이다. 서슬퍼런 대통령 이승만이 사법부 판결에 불만을 표하면 '그러면 항소하시오'로 대응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 이승만은 대법원장 김병로를 물러나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의 아내는 1950년 6.25 전쟁 중 빨치산에게 살해됐다. 그러나 그는 반공보다 인권을 우선했으며 그 정신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끝까지 주장했다. 굳이 국가보안법이 아니라도 내란죄, 외환죄, 기타 법으로도 충분히 나라의 안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옥상옥'인 국가보안법은 행위에 대한 처벌이 아닌 머릿속 생각을 처벌하는 법으로 인권을 유린할 수 있으므로 폐지해 마땅하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주장이었다. 





김병로의 묘소를 찾으며 나는 대통령 이승만이 김병로의 안부를 물었듯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요즘 대한민국 사법부는 잘 계신가?" 

초대대법원장으로서 사법부 독립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김병로. 오늘날 대한민국은 헌법정신과 사법부의 독립성은 잘 지키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를 탓하지 마라.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최대의 명예 손상이 될 것이다." 

1957년 12월 퇴임사에서 김병로가 한 말이다. 그리고보니 또 하나의 질문이 꼬리를 문다.  

"요즘 대한민국 사법부의 명예는 잘 계신가?"


가인초등학교 - 1934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김병로는 현재 서울도봉구 창동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의 호를 딴 '가인로'와 '가인초등학교'가 김병로를 기억하며 뜻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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