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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Jan 23. 2023

해방기원일지-꼰대인 나

대한민국현대사 속 우리들의 이야기(4)

인생은 운7 기3이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운3 기7의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운3, 기7의 인생


1974년 어느 날, 어머니가 큰 이모 집네 갔다가 갓난아기를 안고 왔다. 동생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3대 독자 집안에 시집와, 그 쓸쓸함이 싫어서 아들 삼형제를 낳겠다는 결심을 했단다. 

3남을 얻고도 40세에 나를 45세에 막내를 낳음으로써 

3남 4녀로 과업을 초과달성한 뒤 어머니는 출산을 마치셨다. 


어머니는 가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니는 왜 낳아가지고.”

어머니 스스로 결심한 과업인 아들 3형제는 NO.5 오빠로 완성됐다. NO.6 나는 딸이다. 없으면 좋은 '혹'이란 얘긴데... 막내도 딸이지만 귀여운 혹이라 그런지 그런 말을 안 했다. 안다. 삶이 벅차게 힘겨워서 그랬다는 것을.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나도 신기했다. 서로 소 닭 보듯 하면서 자식은 일곱이나 쑥쑥 낳는 것이. 설마, 내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아니겠으니 나는 억울할 수밖에,  


아버지는 술이 거나해지면 내게 말했다. 

"성적표에 ‘1’를 못 단 자식은 니뿐이다."

안다. 겨우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던 아버지의 회한을 풀어준 자식들, 그 자랑의 화룡점정을 못 해서 아쉬워한 것이지 미워한 것은 아니란 걸. 그걸 비수로 받은 내 성질 머리가 문제겠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억울한 건 나지! 머리 나쁘게 낳은 건 아부지고. 1등은 나도 하고 싶어.”

했다가 애먼 뒤통수가 운동 제3법칙 작용과 반작용을 경험하고, 덤으로 눈앞에 펼쳐진 우주를 구경해야 했다. 말은 '못된 주둥이'가 했는데 항상 뒤통수가 고난을 겪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듯, '말'은 곧 권력이다. 그때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무슨 말이든 해도 되는 사람 그들은, 듣기만 해야 하는 이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아버지 말씀이 '갑'이었다. 옳든 옳지 않든. 따졌다간 뒤통수가 고난을 당할지니.

'가(집)'에서는 '부(아버지)'가 짱을 먹는 '가부장'은 아주 오래된 역사다? 아니다. 

우리 역사 5천 년 가운데 불과 400년도 안됐다. 

때는 바야흐로, 병자호란 후. 전쟁이 끝나자 지배층은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지배할

 "멩분이 없다 아이가, 멩분이!"  

전쟁이 나자 제일 먼저 도망가고, 제일 나중 돌아온 양반님들은 

임금님이 떼놈 오랑캐에게 무릎까지 꿇었으니 상민을 지배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새 가슴에 간은 콩만했어도 'JQ' 잔머리지수는 뛰어났으니, 얼른 '멩분'을 만들어낸다. 

이름하야 '가부장' 이데올로기. 그것과 '세뚜'로 '주자가례'를 앞세우니, 제사절차가 복잡해진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 동두서미. 이럴 때 나는 생각했다.

'귀신들은 눈이없냐 차린것도 못쳐먹고.'

자리가 조금 바뀐다고 못 찾아 드시는 조상님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당시 이것에 토를 달거나 주자가례를 모를 시, 백전백승, 전전후의 칼과 방패가 있었으니

"예법도 모르는 상것!" 찌르기와 "주자님 가라사대"의 가로막기에 사용됐다. 

주자님 말씀을 닳고 닳게 공부하셨다는 양반님들이 복잡다단한 제사법을 '말씀'하시며

상놈들을 드잡이하면 어쩌겠는가? 

책이라곤 구경도 못했고 구경이라도 한다 쳐도 주자님 말씀은 다 한문으로 적혀 있으니

한양 갔다 온 놈이 남대문에 문턱이 있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경복궁이 3층이라면 그런가보다 해야듯

양반님이 '주자님 가라사대'하며 감놔라 배놔라 하면 그리해야 했다. 


제사법이 복잡해지고 제사상이 무거워질수록 여성들 허리가 죽어났다. 

그렇게 제사로 기를 죽인 양반님들은 사회를 '제사'로 수직계열화시켰다. 

수직계열화의 '멩분'은 제사권이었다. 

그러므로 부-장자-장손은 최상위, 최하위는 '여자 어린이'였다.


나는 '응애'하는 순간부터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같은 아버지의 DNA를 받아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자랐어도 같은 성질, 같은 능력을 타고 나지는 않는다.

게다가 산골짜기 가난한 농부집에, 6번째에,  딸이었다. 

태어나면서 운에 기대 살기는 글렀고 기를 쓰고 살아야 한다는 운명을 알게 된 것이다. 



6월, 그 아름답지 못한 계절


학교에 입학했다. 

교실 안은 담임의 천하였다. 담임에 의해 수직계열화된 또 다른 세상.

운동장에서 애들을 끌고 다니던 영수도 담임 앞에서는 쪽도 못쓰고 풀이 죽었다. 

담임의 권력은 칭찬과 벌에서 나왔다. 담임에게 칭찬받는 방법은 오호라 뭔가를 ‘잘’하면 됐다.


청소를 잘할까? 이건 순간적이며 휘발성이 강해 청소시간이 지나면 효력이 사라졌다. 

운동을 잘할까? 이건 몸이 고달팠다. 대회 즈음이면 먼지구덩이 운동장에서 살아야 했다. 

순종을 잘하면? 이건 메리(우리 집 개 이름)처럼 굴어야 했다. 영혼을 없애야 할 것 같았다. 

글짓기를 잘하면? 이건 좀 나은데, 그림 음악과 함께 대회가 끝나면 칭찬도 끊겼다. 


그러나 이런 구질구질함 없이 '폼'까지 나는 확실한 방법이 있긴 했다. 

성적표에 '1'자를 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부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1'말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용서받게 했고, 허용되게 했다.  

그런데 이놈의 썩을 '1'이란 놈은 아주 까탈스럽게 사람을 가렸다. 

덤빈다고 아무나에게 주지 않았다. 

훌륭한 DNA를 갖고 태어나거나(어떤 놈한테 주는지 이유나 좀 알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꺾이지 않는 인내’로 엉덩이에 곰팡이 쓸 때까지 해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포기가 빠르다. 안되는 것에 괜한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엉덩이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왜? 내 몸은 소중하니까. 

운7이 아닌 기7로 살려면 몸을 아껴 아껴 써야 한다.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림자’가 되는 것이었다. 

조용하게 은밀하게 쥐죽은듯이. 눈에 띄지 않아야 덜 혼나고 덜 맞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월이 다가오면 그림자의 생활도 잠시 접어야 했다. 

6월 즈음이면, 우리는 최대한 잔인해지기를 강요받았다. 

‘찢어 죽이자 공산당’을 보며 자란 우리더러 이보다 더 잔인한 표어를 만들라고 했다. 

잔인할수록 상을 받았고, 학교 외부 대회를 나갔고, 전교생이 보도록 전시됐다. 

강원도 울진 듣도보도 못한 마을에서 죽었다는 ‘이승복’의 참혹한 죽음을 보여주며 

애끓는 슬픔과 피 끓는 적개심을 잘 버무린 글을 쓰라고 했다. 

적개심의 농도만큼 상을 받고,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것쯤이야.' 

그림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상 욕심을 버리면 된다. 

상 받으려고 기 쓰는 놈들은 많으니까 그놈들 가져가라 하고. 

그냥 찍찍 그려서 내기만 하면 되니까 잠시 성가신 정도? 


그런데, 3학년인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 

1968년 12월  ‘위대하신 각하’가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신 후 

전국의 학생들은 이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야 했다. 

반 전체가 외울 때까지 외우기를 반복하며 못 외우면 남아서 외우고, 

그래도 못 외우면 맞았다. 그걸 외우라고 시켜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골백번은 한 것 같다. 

내 이마를 자판기 누르듯 꾹 눌러보시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 결과, 40년도 훌쩍 지난 지금도 자판기 캔 나오듯 첫머리가 저절로 나오는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각하는 부하가 쏜 총을 맞고 저 세상으로 갔다. .


이것 말고도 학교에서는 피곤한 일이 수두룩했다. 가을 운동회를 열 즈음이 되면 수업시간에 온통 운동장에 살면서 매스게임(단체 율동이나 체조) 연습을 했다. 한 명도 틀리지 않고 '일사불란'할 때까지. 그것 말고도 수시로 호출당해 불려 나가고, 매를 맞고, 단체기합을 받고, 월요일마다 교장 훈화말씀을 듣고, 날마다 국기에 맹세를 해야 했다. 참, 국기 옆에는 '각하들' 사진이 있었다. 


그렇게 그림자로 살 자유조차 없이  '어린 국민'은 자꾸 호출됐다.  

호출해서는 줄을 세우고 순번을 매겼다. 

키대로 줄세우고 번호매기고, 성적대로 줄세우고 번호매기고, 선착순으로 줄세우고 번호매기고.

줄을 설 때마다 번호가 주어질 때마다 나는 이 수직계열화에서 내가 몇 번째인지를 확인했다. 


나는  ‘위대하신 각하’가 통치하던 시대에 태어났다. 첫울음과 함께 첫 폐호흡을 할 때부터 독재의 공기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신군부의 통치 아래 국민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국민이란 '복종'을 미덕으로 여긴다. 복종은 '차별'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사회는 철저하게 수직계열화 된다. 

 

국민교육의 뿌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간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는 군국주의로 무장해  ‘충실한 신민을 양성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1938년 <조선교육령>이 제정되면서, 조선어금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이 강요됐다. 학교는 군대식으로 바뀌었다. 자로 잰 듯 줄을 서고, 담임에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황국신민서사(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국민교육헌장의 모델)’을  외우게 했다. 초등학교 이름이  '보통학교'에서 ‘국민학교’로 바뀐 것도 이때이다. 


내가 어린이였던 1970년대 '국민학교'에서는 일제강점기와 같은 교육목표를 가지고 우리를 가르쳤다. 분단이란 특수한 상황은 뇌 구조를 아주 단순화시켰다. '적'아니면 '아군'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고등학교  '교련'시간에 군대처럼 훈련하고 총검술까지 배웠으니 우리 세대는 평화를 지향하는 것보다 '적개심'에 반응하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우린 학교에서 작은 병사로 자랐으니까. 병사는 '말씀'에만 반응한다. 영혼을 가진자는 고난을 당할지니.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항상 '말씀'이 있었다. 

'말씀'을 듣고 '복종'을 잘하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말씀을 할 수 있는 분은 끊임없이 분화되어 존재했다. 

가진 자와 못 가진자, 남성과 여성, 어른과 어린이. 

세상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는 여성이 아니라 여자아이였다.   


'가스라이팅', 지금 생각하면 이게 불평등한 구조 속 가스라이팅이었다.  

"넌 못났어!"

"시킨 대로 해!"

줄서기와 번호매김은 우리에게 날마다 어딜 가든 속살거렸다. 



국민교육과 꼰대기질


"내가 꼰대라고?"

이 ‘꼰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꼰대'라는 말이다. 

펄쩍 뛰며 억울해서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또 라떼는이야?" 라며 말이 잘린다. 

이렇게 당혹스러울 수가! 


'꼰대'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이다. 

내가 구태의연하다고? 강요한다고?  

그러나 내가 꼰대임을 부정할 수가 없는 시간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아이를 키우면서였다.

"말을 하면 ‘착’ 들어야지."

"어디서 ‘토’를 달고 그래."

"말 들을래 맞을래?"

어디서 아닌 척, 꼰대 맞지 않은가! 


인간의 발달단계를 설명하는 이론에서 가라사대, 사람의 사고의 틀은 20세 이전에 형성된다, 그 이후 경험이 사고에 영향은 줄 수 있지만 틀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보고 듣고 자란 게 무섭다는 이야기이다. 그 말을 우습게 여겼는데, '꼰대본능'은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마치 '지의류'가 물을 만나면 살아나듯 '주둥이'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그런데 이 말들, 익숙하다! 어릴 때 '말씀'을 가진 분들에게 들었던 말이다. 

수직계열화 속 차별주의는 내가 조금만 높다 싶으면 

그 생각이 '구태의연'한지 어떤지 성찰도 없이 나보다 낮다고 여기는 이에게 강요한다. 


대물림이란, 이렇게 섬뜩한 일이었다. 



꼰대의 해방을 기원하며 


20대 한창이던 시절, 술을 먹으면 꼭 이런 애들이 있었다. 

우는 애, 행패부리는 애, 같은 말을 한없이 반복하는 애, 얌전하다가 거칠어지는 애. 이런 주사들에는 다 사연이 있었다. 가난때문이거나, 가정내 폭력 때문이거나, 어딘선가 받은 차별 때문이라는 구구절절한 사연들. 그렇게 그때는 지금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폭력', '차별'이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1990년대, 사회의 차별과 수직계열화는 만연해 있었다. 취업을 위해 원서를 넣으려고 하면 '병역필'만 지원할 것이란 요건이 버젓이 공개됐다. 날마다 남성인 선배와 동기의  ‘성희롱 발언’에 다시는 못하도록 고약하게 되받을지, 더 센 농담으로 받아칠지, 뭉개고 같이 깔깔대고 웃을지를 갈등했다. 그때는 '차별'을 제재할 통로가 없었기 때문에 술자리와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는 걸로 풀 수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속이 좀 배배 꼬여 있다.  

"이만하면 복된 세상인 줄 알아 이것들아."

샘 반, 질투 반으로 '이 편한 세상'에 만족할 줄 알라니, 그러니 '꼰대'일 수 밖에.  


대한민국이 '시민의 자질을 함양'하도록 교육목표가 바뀐 것은 1992년 개정된 제6차 교육과정부터였다. '국민교육'이 아닌 '시민교육' 으로 교육목표가 전환된 것이다. 이 목표 아래 초등교육부터 중등교육까지 받은 세대는 MZ세대부터이다. '시민교육' 30년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 '인권감수성'은 인격의 지표가 되고, '말씀'의 카리스마가 아닌 '공감'능력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소양이 되었다.


'국민교육'세대는 배운 적이 없으니 민주적인 절차와 방식이 서툴어서 성가시고, 인권감수성 성인지감수성은 뭐가뭔지 헷갈리고, 상명하복이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상명하복은 힘을 가진 '상명'인 자의 편의일 뿐, 힘을 가지지 못한 '하복'인 자에게는 이득이 없다.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해방되기로 결심한다. 내 안에 꿈틀대는 권위주의와 국민주의로부터. 기를 쓰고. 


지금 대한민국은 국민교육의 성찰없는 권위주의자들이 권력을 가지면 어떻게 하는가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타산지석 삼아 성찰이 더욱 절실하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교육과 생활 속 민주주의 체험의 역사가 얕고, 그런만큼 뿌리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 다만, 내 안에 세뇌된 국민주의와 권위주의가 독기를 품고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자.  


어쩌겠는가!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난 걸. 기를 쓰고 해방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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