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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Dec 23. 2022

우이구곡 길-강북구 1

서울 25개 구 길 위의 역사-구경(9경)시리즈

북한산 찬가


북한산은 매력적이다. 어느 골짜기 어느 산자락을 찾아도 후회가 없다. 햇볕이 따뜻한 날이면 자잘하게 부서지는 햇살에, 36.5도 체온을 상쾌하게 씻어주는 바람이 우울기를 바삭하게 날려준다. 북한산은 나를 온전히 맡기기 좋은 산이다. 

우이동계곡-북한산 세 봉우리를 마주하며 걷는 길

북한산은 나만 받아주기에는 너무 큰 산이다. 그가 누구든 옆구리 비비적거리며 발을 디밀면 넉넉히 받아준다. 그래서 골골마다 사람들이 모이고 마을이 생겼다. 북한산이 등장하는 역사 기록은 삼국이 건국될 때부터이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내 소서노가 두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새 나라 백제를 건국할 때 부아악(인수봉)에 올라 도읍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2천 년도 넘게 사람들을 품었으니 북한산에는 이야기도 많다. 관련 인물과 유적지가 골골마다 차고 넘친다. 


북한산 둘레길 동쪽 끝에서부터 걷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걷다가 이야기가 있으면 듣고, 인물이 살았다면 그 터전을 더듬어 보고, 역사가 새겨져 있다면 잠시 발을 멈추고 그 긴 이야기를 들어보리라. 





소귀골, 우이계곡 벚나무


첫 번째 장소는 우이계곡이다. 우이계곡은 물이 마르지 않는다. 계절 따라 옷을 바꿔 입는 산 사이로 쉼 없이 물이 흐른다. 계곡 옆으로는 오래된 나무들이 줄지어 늙은 티를 뽐낸다. 몸매와 껍질, 잎사귀를 보니 벚나무다. 봄이 되면 이 계곡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며, 벚꽃과 관련된 우이계곡만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하니 들어보시라.  


봄철, 우이계곡의 자랑은 벚꽃이다. 우이동 벚꽃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명승지 반열에 올랐다. 소위 '핫플레이스'였다. 아침에 출발해 오후에 돌아오는 청량리-창동 간 특별 열차를 편성할 정도였다고 하니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봄철 계곡에 만발한 우이동 벚꽃이 뿌려주는 황홀한 함박 꽃잎 눈를 맞으며 계곡의 맑은 물소리 따라 밀려드는 나들이 인파는 우이동계곡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음식점과 숙소들은 서울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이동을 떠올리는 추억 한 가지쯤은 가지게 해주었던 곳이다.  

<사진-기상청>

이제 본격적으로 우이계곡 벚꽃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별생각 없이 보면 우이계곡의 벚꽃이 어울렁 더울렁 자연스럽게 군락을 이룬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이동 벚꽃은 어떤 이가 200여 년 전에 일부러 조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것도 일본으로 파견 가는 통신사를 쫓아가 특별히 부탁해서 벚꽃 모종을 가져오게 해서 이 우이동 계곡에서 묘목을 번식시켜 한 그루 한 그루 심어 조성했다고 한다. 이 일을 한 사람이 홍양호이다. 그는 왜 굳이 일본 벚꽃을 부탁해 가져와 심어 군락을 조성한 것일까? 


"꽃은 보기에 좋고, 나무는 활과 화살을 만드는데 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으냐"


백병전을 벌이던 때 동양 3국의 최고 병기는 일본은 칼, 중국은 창, 조선은 활이었다. 비록 화약과 총이 보급되었지만 아직은 이런 백병전의 무기가 정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 천년 동안 우리 전통무기의 자랑이던 활은 물소뿔, 산뽕나무, 대나무, 소힘줄, 그리고 벚나무 껍질로 만든다. 홍양호가 여기에 벚꽃은 심은 것은 국방을 강화하던 당시 조정의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곧 우이동 벚나무 군락에는 실생활의 효용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홍양호의 실학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별난 인물, 이계 홍양호


홍양호는 영조, 정조 때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이다. 정조가 사랑하는 신하였지만 정조가 왕에 오르자마자 바로 좌천된다. 정조의 남자, 당시 세도정치의 핵심인물 홍국영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좌천되어 간 곳은 조선 땅에서도 가장 끄트머리 경흥이었다. 경흥은 두만강가에 자리하는 변방에서도 변방이었다. 

그가 도착한 때는 칼바람이 살을 찢는 엄동설한, 혹독한 겨울이었다. 얼마나 추웠는지 도착하고 한 달이 넘게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방 안에 콕 박혀 지내던 홍양호는 날이 풀리는 3월이 되자 서둘러 자신의 관할지를 둘러본다. 도도한 두만강 너머는 여진(만주족)의 터전이었다. 강 안쪽 관할지는 대개가 산이어서 맹수의 출몰이 잦았다. 겨울이 오면 강 건너 드넓은 벌판을 휘몰아쳐 온 북풍의 한파가 초가지붕은 물론 기와지붕도 날려 보낼 정도였다. 여름은 어떤가? 장마가 지면 백두산 근처에서부터 쓸려 온 급물살이 애써 가꾸어 놓은 백성들의 땅을 휩쓸고 지나갔다. 남북으로 800보 관할지와 백성들의 생활을 살핀 홍양호는 명한다. 


"장정들을 불러 모으라."

<이계집> 북색잡요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양호는 관할지 장정들에게 버들가지를 주며 강가에 목책처럼 줄지어 심으라고 한다. 그렇게 심은 버드나무가 총 3만 7천5백 그루였다. 홍양호는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임금님의 사랑을 받는 지체 높은 양반 나리였다. 잠시 좌천되어다고 하지만 조용히 놀고 먹으며 임금이 한양으로 불러올릴 날만 기다려도 될텐데, 왜 나무를 심으라 했을까?


홍양호가 버드나무를 심는 5가지 이로움을 말한다. 

1. 국경인데 우리 땅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이는데 나무를 심으면 은폐를 할 수 있다.

2. 여진족은 말을 타고 돌격하는데, 나무를 심으면 목책이 되어 방어벽이 될 것이다.

3. 여름에 범람하는 물길을 막아 농토가 유실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4. 땔감으로 쓸 수 있다.

5. 겨울의 북풍을 막을 수 있다. 


홍양호의 경흥 부임 기간은 3년이었다. 세도정치를 일삼던 홍국영이 축출되면서 그의 미움을 받아 경흥으로 왔던 홍양호도 한양으로 돌아온다. 그 뒤 평안 감사, 이조 공조 예조 판서(지금의 장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최고 수장까지 핵심관직을 두루 거친다. 


그러나 당시를 살았다면 누가 알았겠는가? 홍국영의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가 꺾일 때가 언제인지. 결과만 보고 옛사람을 평가, 판단 짓는 것은 후대의 오만일 수 있다. 그래서 홍양호의 경흥 생활은 다시 짚어볼만하다. 그는 좌천되어 절망적인 시절, 권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호시탐탐 한양 바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부임한 지역을 돌며 백성들을 이롭게 할 일을 실행에 옮겼다. 또 지방의 풍속과 백성들의 삶을 따사로운 눈으로 보고 조사해서 기록하여 <북색잡요>에 남겨 우리 전통의 생활 문화 기록을 풍요롭게 했다. 


우이구곡을 경영한 홍양호


1800년 정조가 승하했다. 홍양호는 1년 더 관직에 머물다 물러나야 했다. 정조의 아끼던 정약용을 비롯한 신하들이 그랬듯 그도 정순왕후 세도정치 서슬을 피하진 못했다. 1801년 퇴직 후 조용하게 노년을 보내기 위해 우이동 계곡으로 온다. 왜, 하필 우이동이었을까? 

우이구곡 1곡의 출발 도선사에서 본 풍경

홍양호의 증조 홍만회의 묘소와 재실이 여기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홍양호의 증조부 홍만회 이야기를 해 보자. 홍만회는 정명공주 아들이다. 정명공주는 얼마 전 MBC 드라마로 방영됐던 <화정華政>의 주인공의 모델이며, 인목대비의 외동딸이다.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어 서러운 5년의 세월을 보낼 때 어머니와 함께 공주 지위를 뺏기고 함께 유폐되었던 인물이다. 16세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었는데, 복권되고 보니 나이가 21세였다. 당시로는 혼인이 너무 늦어져 부마에 걸맞은 신랑감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약혼한 사람을 파혼시키고 혼인하게 된다. 홍씨집안의 홍주원이었다. 부마가 되면서 왕실의 일원이 되면서 홍주원은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아들 홍만회가 우이동계곡에 묻히면서 홍양호 집안은 우이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퇴직 후 홍양호는 증조부모 묘와 재실을 주변을 본격적으로 '경영'한다. 계곡가에 소귀당이란 집을 짓고 수재정, 겸산루, 그 옆에는 연미천 물을 끌어와 바위틈으로 졸졸 물을 흘러 보내 화영지를 만든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현재 도선사에 이르는 곳까지 1곡 만경폭포, 2곡 적취병, 3곡 찬운봉, 4곡 진의강, 5곡 옥경대, 6곡 월영담, 7곡 탁영암, 8곡 명옥탄 9곡 재간정을 경영하며 '이계구곡'이라고 한다.  

우이구곡- 6곡~9곡까지는 경관이 사라져 추정지라고 한다

구곡은 18세기 조선의 학자라면 한 번쯤 경영해 보고 싶어 하던 로망이었다. 이 흐름과 문화현상을 '구곡문화'라 이름한다. '구곡'은 조선의 정신적 기둥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로부터 비롯된다. 주자가 무이산에 '무이구곡'을 경영한다. 이것을 본따 그를 흠모하던 성리학자들은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벗 삼아 살게 되면 구곡을 경영하는게 당시 유행이었다. 유명한 구곡으로 퇴계 이황의 도산구곡,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 우암 송시열의 화양구곡이 있고, 그 밖에도 전국에 150개가 넘는 구곡이 있었다고 한다.

 

구곡은 자연 풍광을 보며 쉬고 노는 곳만은 아니다. 자연에서 학자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을 반영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에 이름을 붙이고 명상하며 성찰하며 수양하던 장소였다.  

  

'영과후진 盈科後進' 

우이구곡6곡-월영담

물은 웅덩이를 채우고 난 후 다시 흐른다는 말이다. 맹자님 말씀이다. 물을 본다. 이 녀석은 쉼이 없다. 무엇이 나타나든 거침도 없다. 바위가 가로막으면 부서지고, 작은 돌멩이는 쓰다듬고, 우뚝한 나무뿌리는 감싸고돈다. 주어진 것에 맞추어 유연하되, 포기하지 않으며, 바다를 향해 가는 길을 잊지도 않는다. 어찌 그러할 수 있을까? 시원이 되는 샘이 마르지 않고 솟아나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구나 인간의 삶도 또한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산을 본다. 산은 어떠한가? 물이 골짜기에서 어떻게 흘러서 가든 개의치 않는다. 우뚝 솟아 봄, 여름, 가을, 겨울 늠름한 기상을 잃지 않으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등태산이소천하 登 太山而小天下'


산을 올라 본다. 오르는 높이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 산만하던 산줄기가 정리되어 굵어지고 산이 깊어질 수록 세상은 더 넓게 보인다. 그래서 산을 오를 수록 세상사가 다르게 보인다.  


산과 물과 자연을 통해 학문과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자 했던 구곡문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화활동 중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품위 있는 조선 선비들의 문화생활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전국 150여 개에서 발굴되어 연구 중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한다. 이계구곡은 비록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150여개 구곡 중 하나이며, 서울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구곡이다.  


산처럼 물처럼 

 

수원화성 장안문-정조는 당시 명필이었던 홍양호에게 상량문을 쓰게 했다

홍양호는 <목민대방>이란 책을 남겼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보다 앞서 지방으로 부임한 사또가 통치할 때 방향, 운영방식, 그리고 마음가짐을 정리한 책이다. 지방 수령의 올바른 역할을 정약용만 고민해서 정리한 것은 아니란 얘기다. 영조, 정조 시기 국정에 대한 지식인들의 고민과 논의가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홍양호는 1801년 이곳에서 구곡을 경영하며 일생에서 가장 편안한 삶을 보낸다. 그러나 다음 해인 1802년 세상을 등지고 만다. 어려서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와 살며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관직에 나가면서 궁핍함에서 벗어났을 것이고, 홍국영 세도시절 고난은 있었지만 그만하면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중에서도 아마 조상님들을 돌보며 자연과 벗삼았던 우이계곡에서 1년 여 삶이 그에게 가장 편안한 시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시절 홍양호의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홍양호의 <늦봄 이계를 나서는 길에 짓다>


가랑비에도  봄이 온 들은 훤한데

고운 풀 돋아난 언덕길을 거닌다.

세 봉우리 산은 얼굴 앞에 솟아 있고 

만 그루 버들은 눈썹처럼 가지런하다.

어느 곳에 소의 귀를 찾으랴,

유유히 말 가는 대로 가노라. 

복사꽃 천 그루 안에

초가가 맑은 개울에 걸터앉아 있네. 


-옮김 : 이종묵, <홍양호와 홍경모의 글로 남은 우이구곡의 기억>



우이구곡에 남겨진 자본과 권력의 오만함

 

우이구곡 안내판-1~5곡은 가까이 갈 수 없어 멀리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우이계곡은 홍양호가 보았던 그때 풍경은 아니다. 구곡의 길은 우선 삼양로라는 도로로 많이 잘려나갔고, 유원지였던 시절 난개발로 경관이 훼손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북한산 세 봉우리를 등지고 서면 수락산, 불암산을 멀리 내다보았다는 풍경은 보이지 않고 눈앞에는 마구잡이 전선이 시야를 어지럽게 할 뿐이다. 


우이구곡의 길을 끊어 놓은 것은 우선, 도선사까지 오르는 도로 '삼양로'이다. 이 길은 원래 도선사를 중창한 청담스님의 이름을 따 청담로라고 불렸다. 청담스님은 육영수 여사가 믿고 따르던 정신적 스승이었다. 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도선사를 자주 찾았고 그 길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이 길을 닦았다고 한다. 


우이구곡 4곡까지는 그나마 멀리서라도 볼 수 있는데 5곡은 길을 잃고 만다. 음식점과 카페가 길을 막아버린다. 그중 카페는 우리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선운각'이다. 이곳은 박정희 대통령 당시 요정정치의 현장이었다. 요정은 청와대 영빈관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던 때라 내외빈을 맞이할 장소가 필요했던 까닭도 있지만, 권위주의 정부의 밀실정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서울에는 유명짜한 대표 3대 요정은 삼청각, 대원각, 선운각이다. 60년대, 70년대 요정정치와 부패한 정치 세력간의 결탁을 알린 떠들썩한 사건이 '정인숙 살해 사건'이었다. 정인숙이 선운각의 마담이었다. 그녀의 수첩에서 정재계 거물들의 이름이 나오고 세상에 회자되면서 이목을 끌었지만, 사건은 떨떠름하게 종결되고 만다. 

우이계곡에 자리한 선운각

선운각은 지어질 당시부터 특혜 논란이 불거졌다. 국립공원 북한산 자락에 1만 5천 평 부지 대규모 공사가 허락된 것이며, 영업허가가 나기 전부터 영업을 시작한 사실이 신문지상에 보도됐다.  

요정정치의 시대가 끝나면서 선운각도 영광의 시절을 마치게 된다. 그 뒤 이 동네 계모임은 다 여기서 했다고 할 정도로 크고 유명한 '고향산천'이라는 음식점이었다가, '할렐루야 수도원'으로 넘어갔다가, 지금은 한옥카페 '선운각'으로 다시 문을 열어 운영하고 있다. 


우이구곡을 답사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며 가장 많이 떠올린 낱말은 '겸손'이었다. 200년 전의 정조 때 역사로부터, 권위주의 정부의 역사까지. 권력과 자본이 자연에, 세상에, 인간에게 어떠해야 후대의 가슴을 감동시키는가를 생각해 본다. 적어도 인간은 자연에, 세상에, 공동체에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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