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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Dec 28. 2022

3.1운동의 발원지 봉황각-강북구 2

서울 25개 구 길 위의 역사 -구경(9경)시리즈


샛길로 빠졌다가 만난 곳, 봉황각


샛길이 좋다. 한길에서 갈라진 샛길은 눈길을 주면 입구만 보여주고 그 너머를 쫙 감추어버린다. 그래서 더 호기심이 발동한다.  한길이 목적지향적이라면, 샛길은 무목적의 두리번거림의 길이다. 빈둥거릴 시간이 있을 때 생각 없이 하릴없이 거닐어본다. 결과는, 대부분은 별개 없다. 가끔은, 한길과는 다른 예기치 못한 맥락 없는 생경함에 잔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아주 가끔, 대박을 만나기도 한다. 


북한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강북구만 해도 수없이 많다. 나는 우이분소에서 조금 오르다가 진달래능선을 타거나, 소귀천을 따라 대동문으로 오르거나, 도선사 쪽으로 길을 잡는다. 하루는 산에 오를 요량으로 집을 나섰는데 왠지 꾀가 났다. 그날따라 다리가 무거웠다. 산을 꼭 가야 하나 게으름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우이분소쯤 왔을 때, 우연히 이런 표식을 보게 된다. 


'천도교종학대학원 천도교의창수도원'


천도교? 여기 천도교 관련 건물이 있었구나. 꾀가 난 김에 기웃거려 봤다. 소박한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3.1정신의 발원지, 3.1운동의 발상지'


곧 2층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근사한 근대식 건물이 나왔다.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또 뭐가 있을까 호기심이 더욱 발동했다. 그래서 그 건물을 돌아갔다. 와 대박, 이 장면을 만나려고 오늘 꾀가 났구나! 무릎을 쳤다. 바로 이런 풍경이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산 세 봉우리가 보이는 봉황각 앞마당.  한 번 발을 들여놓은 뒤, 나는 자주 이곳을 찾게 됐다   

봉황각을 알고 난 뒤 나는 자주 이곳을 들른다. 그리고 자료를 찾아 읽으면서 이곳을 사랑하게 됐다. 

 

3.1운동의 발상지 봉황각


1908년,  손병희는 우이동계곡으로 들어와 은거한다. 그리고 값을 묻지 않고 주변 땅을 사들인다. 그렇게 사들인 땅이 약 3만 평. 여기에 봉황각 말고도 12채 건물을 더 짓는다. 그런 다음 전국에 천도교 전국 교구장들을 불러들인 다음 수련을 시작한다. 1912년 4월부터 1915년까지 총 7차례 연성수련회는 본'성'을 '연'마하기 위한 종교적 수련처럼 보였다. 하지만 손병희에게 숨은 의도가 있었다. 1910년 나라를 잃었을 때, 손병희는 이렇게 말한다.

오세창이 쓴 '봉황각'. 오세창은 손병희의 오랜 동지였다. 해방된 맑고 파란 조국 하늘을 그리며 '봉황각' 세 글자를 썼을 것이다. 봉황은 태평성대가 되면 날아오른다고 한다


"나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 능력을 시험하게 될 것이니 그때는 그야말로 만고에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만고에 없는 일'을 손병희는 이곳에서 준비한다. 1918년 12월, 전국 교구장들에게 명령이 내려간다. 


"49일 촛불기도회를 실시하라!"


전국의 천도교 신자들은 저녁 9시, 맑은 물과 쌀 한 홉,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1919년 1월 5일에서 시작해 2월 25일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준비가 빛을 본 것은 1919년 3월 1일.  만세소리가 서울 탑골공원에서 솟구치자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데 천도교의 전국 조직망은 그 도화선이 된다. 우리의 능력을 보여줄 그때가 오자 훈련된 천도교지도자들과 천도교인들은 벌떡 일어나 3.1운동을 전국적, 전민족적 운동으로 확산시켜갔던 것이다.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던 손병희는 때가 오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봉황각에서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 보았던 붉은 벽돌의 2층 건물도 3.1운동과 관련이 깊다. 원래는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대교당과 함께 있었는데, 1969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 도시개발에 밀려 철거하려던 것을 역사적 의미가 깊은 건물이라, 벽돌 한 장 한 장을 해체해 우이동 계곡에 다시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 옛 모습대로 재건했다고 한다. 


1918년 4월 천도교 총회에서는 대교당을 짓기로 결의한다. 건평 212평 대교당을 짓기 위해 교인 1호당 10원씩 성금을 모았다. 대교당 건축 특별 쌀 모으기를 벌여 모은 돈 수 만원. 또 전국교인들의 기도회를 행하게 하고, 담배를 끊고 날마다 짚신 한 켤레씩 삼도록 해 총 30만 원을 모금했다.  그러나 더 많은 자금이 천도교와 손병희에게로 유입됐을 것이다. 


'화장실 천장에서 신문지로 싼 돈뭉치가 바닥에 떨어지는가 하면, 쌀독에서 현금이 발견'되었다고 손용화(손병희 셋째 딸) 회고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구)천도교중앙총부 건물(왼쪽) - 1969년 이곳으로 옮겨오기 전에는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대교당과 함께 있었다.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이런 움직임을 가만두지 않고 사사건건 훼방을 놨다. 원래 대교당을 500평 규모로 건립하고자 했으나 민족적 감정을 부추길까 우려해 212평으로 줄여 건축하게 한다. 이런 방해에도 1919년 공사를 시작해 1921년 천도교 대교당은 완성된다. 총 22만 원이 들었다. 경운동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위용을 드러내자 단박에 남산 아래 자리한 명동성당과 어깨를 겨루며 서울의 명물로 등극했다. 그리고 대교당 옆에 천도교 중앙총부도 들어서며 민족 최대 종교 천도교의 일대 '천도교 랜드'가 형성된다.  


그럼 모금된 나머지 금액은 어떻게 했을까? 3.1운동자금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자금으로 흘러간다. 3.1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천도교단에서만 쓰인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가 함께 참여하는데 비용을 지급하였고, 기독교 측에도 돈이 전해져 독립선언서가 전국에 배포되는데 큰 도움이 되도록 한다. 손병희는 대교당과 일대 천도교 건물 건립을 앞세워 조선총독부의 눈을 속여가며 독립자금을 모금한 것이다.

 


3.1정신의 발원지와 손병희 묘소 


봉황각에서 담 쪽으로 보면 작은 샛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손병희 묘소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꼭 올라보기를 권한다. 


손병희묘소. 볕이 잘 드는 곳이다. 맞은편에 오봉과 우이령이 마주 보인다. 


백범김구도 귀국 후 곧장 손병희 묘소에 와 참배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의암 손병희선생이 없었다면 3.1운동이 없었고, 3.1운동이 없었으면 임시정부가 없었으며,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광복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손병희는 3.1운동의 중추적 지도자였으며, 종교계를 연합시킨 구심점이었다. 


손병희는 충북 청원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서자로서 설움과 반항 때문이었겠지만 손병희는 어렸을 때 소위 '비행청소년'이 되고 만다. 그러나 동학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고, 그의 타고난 호방한 품성과 담대한 기상과 뛰어난 기량은 동학 지도자가 되면서 진정한 빛을 발하게 된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의 중심 전봉준과 의형제였다.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때 전봉준이 동학의 남접 지도자로, 손병희는 동학의 북접지도자로 활약한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의 패배 후 동학지도자들이 하나둘 형장에서 사라져 갔다. 유일한 생존자가 손병희였다. 그리고 반역의 종교가 되어 뿌리까지 뽑아 없애려고 하는 탄압을 이겨내고 끝내, 마침내,  동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야 만다. 


의암 손병희 :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 올린다. 대개 인물의 사진은 돌아가실 즈음 사진이라 한창 활동할 시기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진-전쟁기념관>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고 실수도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반역의 종교가 되자 동학이란 이름을 더 이상 내걸고 포교를 할 수 없었다. 손병희는 몸을 숨기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적국인 일본으로 건너가 있었다. 그래서 이용구에게 '대동회'를 만들어 조직을 재건하라고 지시한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의 승전국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군을 지원한다. 당시 유행했던 '아이사연대론'에 영향을 받기도 했거니와 일본의 현대화된 모습을 보고 이런 결정을 한 듯하다. 그런데 일본의 속내는 '을사늑약'을 강요하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사이 이용구는 점차 친일인사가 되어 가더니 끝내 친일파 단체 '일진회'와 손을 잡고 친일행위를 노골화한다.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건너와 이용구를 내친 후,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직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다. 기도회를 활성화시켜 기강을 바로잡고 쌀 모으기 운동으로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그리고 3년 만에 신자는 300만, 전국에 교리강습소가 700개, 교구가 200개나 될 정도로 교세를 확장해 명실상부 전국 최대 교세를 자랑하는 민족대표종교로 자리 잡게 된다.


 이 교세가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의 도화선이었고, 그 중심에 손병희가 있었다. 손병희는 1922년에 돌아가신다. 3.1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모진 고문과 혹독한 감옥생활로 뇌일혈로 쓰러지고 만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손병희는 전재산을 교단에 되돌려주라는 유언을 남긴다. 


샛길에서 다시 샛길로 


손병희 묘소에서 왼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있다. 오솔길을 따라 다시 샛길로 접어들어보자. 그곳에는 손병희의 첫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이 묻혀 있다. 

한때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나오던 '대한민국 대표 역사강사'가 있었다.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방송에서 사라진 까닭에 '민족대표 33인', '태화관', '주옥경'이 관련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한 사람의 일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삶, 즉 '그의 역사'를 알아보고 평가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옥경'의 삶을 소개하고자 한다. 


1) 평양기생 주산월


주옥경은 평양기생이었다. 그때 이름이 주산월이다. 그의 제1의 인생이야기이다. 

매일신보 1914년 1월 29일 기사 <사진-네이버블로그 '동학으로 여는세상'>

평양기생은 자고로 콧대가 높았다. 남성의 노리개로 얕잡아 보고 덤볐다가는 노련한 수완으로 되치고 매쳐서 홀라당 벗겨 먹고 내쫓는 평양기생 이야기를 고전소설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평양기생은 양반은 물론 청나라로 오가는 사신단과 국제적 감각을 갖춘 무역상을 상대해야 했다. 춤, 노래, 악기만을 다루는 예능인을 넘어서야 했다. 그들과 고담준론을 나눌 만한 시 짓기, 그림, 글씨뿐 아니라 학문적 소양까지도 요구되었다. 그래서 평양기생들은 자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주산월은 평양기생 가운데 특히 소리로 유명했다. 그리고 악기는 물론이거니와 글씨와 그림 또한 뛰어났으며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주산월에게 가장 돋보이는 점은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당당함이다.   


일제에 국권을 피탈당하자 관청 소속 기생들은 '프리랜서'가 되어야 했다. 주산월도 직장을 찾아 서울로 온다. 그리고 최고급 음식점인 명월관과 명월관 제2호점인 태화관에서 활동한다. 그런데 서울기생들이 '기부(妓夫 남성스폰서)'를 끼고 활동하는 관행이 몹시 못마땅했다. 기부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주산월은 평양기생들을 중심으로 '무부기조합(이후 다동기생조합 : 無夫妓:남성스폰서가 없는)'을 결성한다. 그리고 동료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연활동을 전개한다. 기존 기생들이 주로 공연하던 궁중 가무뿐 아니라  민간 가무를 적극 활용해 대중적인 공연을 펼치며 관객층을 확대해 간다. 또 새로운 공연인 창극에도 도전한다. 남성중심이던  '금녀(禁女)'의 영역을 깨고 활동무대를 넓혀 갔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기생계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일대 새로운 바람이었다.


주산월은 기생이라는 한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근대화하는 달라진 환경을 직시하고 빠르게 사고를 전환한다.  예능인으로 직업의 세계를 개척해 가며, 독립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개척해 갔다. 대중과 호흡하는 무대를 만들고 전문 예술가로서 활동을 넓혀 나가며 동료들과 함께 하는 '연대'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리더였다.  


2) 손병희 부인 주옥경


손병희를 만나고 난 뒤 제2의 인생이 펼쳐진다. 손병희와 혼인하면서 주산월은 이름을 주옥경으로 개명한다. 1916년, 22세였다.  주옥경은 손병희가 비밀리에 3.1운동을 계획할 당시 그 계획을 알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손병희의 믿을 만한 동지였던 것이다. 


손병희가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주옥경은 서대문형무소 앞에 초가집 방 한 칸을 얻는다. 약 2년의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 사식을 나르며 옥바라지를 했다. 만세를 부른 사람들로 미어졌던 형무소에서 곤장을 맞고 나오는 사람 뒤치다꺼리며, 기독교 측 차입비용까지 천도교와 주옥경의 보살핌이 두루 미쳤다. 

고문과 혹독한 옥살이로 뇌일혈로 쓰러져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에서 병보석으로 풀려 났을 때 종로구 숭인동 '상춘원'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손병희를 돌보았던 것도 주옥경이었다. 서른 살이 넘는 나이 차이, 세번 째는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소재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옥경은 손병희를 남편으로서만이 아니라 손병희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동지로서 끝까지 헌신했다는 사실이다. 


수의당(守義堂:의암손병희를 지킨다는 뜻), 존경하는 스승 손병희의 동지로 동반자로서의 삶이 제2의 인생이었다. 

 


3) 여성운동가 주옥경 

            주옥경, <국화> : 오세창에게 그려준 그림                  <사진-네이버블로그 '동학으로여는세상'>


주옥경의 제3의 인생은 여성운동가로서의 삶이다. 손병희가 죽자 주옥경은 손용화(손병희 셋째 딸, 방정환의 아내)와 함께 여성단체 '내수단'을 만들어 이끌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3년간 영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다. 

'의무는 있으면서 권리가 없었고, 입이 있어도 말할 길이 없었고, 노력은 있어도 보상이 없는' 여성들의 삶과 여성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세상에 향해 일갈한다. '옷고름이 거추장스러우면 떼어 버리라'며 불편한 생활을 개선해 나간다. 남녀가 평등해지기 위해서 무엇보다 여성들이 배워야 한다고 '일'로서 차츰 훈련하고 경험을 쌓아가야 차별이 없어질 것이라도 역설했다.  


50년 넘게 여성활동을 해온 주옥경은 민족대표 33인 유족회장, 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천도교에서 최고의 예우직인 '종법사'로 추대했다. 


주옥경은 1894년에 태어나 1982년에 돌아가셨다. 88년 일기 동안 10대에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가 22세까지의 기생 주산월의 삶을 살았다. 그는 기생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에 주눅 들지 않고 당차게 자신과 동료의 삶을 개척해 '혁명'을 일으켰다. 22세에 손병희 세 번째 부인이 되어 28세에 사별한다. 88년의 삶에서 6년 간의 삶이 손병희의 아내로 주목받는 바람에 '주옥경'의 삶을 조명하는데 그늘이 되었다. 그러나 주옥경은 손병희 사후 더 많은 일을 한다. 


여성운동가로 사회활동가로서가 아닌 '평양기생'과 '세 번째 부인'만을 들먹인다면 나는 이 시구를 읽어주고 싶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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