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5개 구 길 위의 역사 - 구경(9경) 시리즈
화계사는 도심에 있는 절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이 글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묶어 글을 쓸까 한다.
1. 흥선대원군과 화계사 2. 일본 불교에 맞서 우리 불교를 지킨 조사들
"대대손손 복을 누릴 묏자리와 황제 두 명이 나올 묏자리가 있는데 어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이라면 어떤 자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대개 가늘고 길게, 대대손손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사람이라면 짧고 굵게, 황제 자리를 선택할 것이다.
오늘 만날 인물 중 한 사람, 흥선군이 바로 그랬다. 과연 황제 두 명이 나왔을까?
나왔다. 흥선군 아들이 고종황제가 되었고 손자가 순종황제에 오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영광은 짧았다. 2명에 그쳤으니.
흥선군 아버지는 남연군으로 남연군 묘는 충청도 덕산에 있다.
흥선군에게 황제가 나올 묏자리를 알려준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화계사에서 이야기의 인물을 찾았다. 화계사의 만인스님이었단다.
만인스님은 흥선군이 화계사로 올 것을 알고 동자승을 시켜 꿀물을 들고 기다리게 한다. 그리고 흥선군을 만나 황제가 되는 비법을 알려 주었다.
이로써 일개 종친이었던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로서 일국의 '대원군'이 되었다. 조선시대 유일한 살아서 '대원군'이 된 인물이다. 그랬으니 화계사를 가만뒀을 리 없다. 일약 '핫플레이스'가 된다
'궁(宮)절'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으며 풍성한 후원을 받았고, 그런 까닭에 화계사 곳곳에 이야기를 남아 있다.
어떤 이야기와 볼 거리가 있는지 슬슬 여행을 떠나보자.
일단 훅 대웅전 앞마당으로 들어가 보자. 대웅전, 그 오른쪽에 명부전,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대방, 세 건물이 '궁절'이던 시절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먼저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신 곳으로 절에서 가장 핵심 장소이다.
이 건물은 흥선대원군의 후원으로 지어졌다. 그랬으니 보통 목수들이 짓지는 않을 것이다.
최고의 장인들이 지었을 대웅전은 조선후기 건물 양식을 잘 담고 있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은 죽은 사람이 극락으로 가길 기원하는 곳이다. 죄를 지어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떨어지는 중생을 구원해 준다는 자비롭고 자비로운 지장보살이 이곳의 주인공이다. 주인공 지장보살 좌우에는 조연 '시왕(十王)'이 있다. '시왕'은 죽은 다음 3년 동안 이생에서 삶을 평가하는 재판을 담당하는 10번의 재판을 담당하는 10명의 재판관을 말한다. 그리고 보조출연 사자와 인왕 등이 있다.
명부전, 이곳에 '보물'이 있다!
"가장 뛰어나고 영험한 지장보살님을 찾아 모셔 와라!"
대비마마가 명하셨다. 이 대비마마는 고종을 양자로 들여 왕이 되게 한 '킹메이커' 조대비마마였다.
12세 어린 양아들 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이라는 '정치 특별훈련'을 담당한 권력의 핵심인물.
그러나 조대비에게도 아픈 사연이 있었으니, 간절히 명복을 빌어야 할 두 사람이 있었다.
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남편 효명세자와 왕에 올라 겨우 15세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 헌종이다.
조대비는 명부전을 짓게 하고 지극 정성으로 두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명령으로 전국을 수소문해 최고의 작품을 찾았으니 황해도 강서사에 명부전에 있었다.
그곳에 있던 지장보살과 시왕, 그리고 사자, 인왕 등을 화계사에 모시니 총 25점.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을 모셔오라 했으니 최고의 작품을 가져왔으리라.
일괄 작품은 당시 명인으로 인정받았던 영철스님이 조각한 것으로 예술적으로도도 문화재로도 가치가 높다.
이즈음 왕실은 손이 귀했고 단명하는 불행이 잇달았다. 고종의 왕비 민씨도 4남 1녀를 낳았지만, 둘째 아들만 살아남았다.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들을 가슴에 묻으며 민비도 여기에서 명복을 빌었다. 대비, 왕비 말고도 후궁, 상궁, 궁녀들이 화계사를 찾았고, 끊이지 않는 발길로 화계사는 번성하게 된다.
왕실이 화계사에 기울인 정성은 절 입구에서 만나는 범종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래된 목어(물고기모양의 악기)는 화계사의 뿌리가 되는 고려시대 보덕암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작은 동종은 경상북도 희방사에서, 구름모양을 본뜬 운판은 전라남도 해남 미황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루 당대 최고의 작품들로 절을 꾸민 것을 엿볼 수 있다.
화계사는 보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대 명필이 쓴 현판이 있으니 이제, 명필을 감상하러 떠나보자.
"조선에서 이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은 없다."
추사 김정희가 이렇게 평가한 사람, 신관호였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다.
신관호는 우리가 아는 유명한 사건과 관련 있는 인물이다.
강화도조약. 이것을 체결할 때 파견된 외교관이 신헌인데, 그의 원래 이름이 신관호였다. 호는 위당이다.
신관호가 쓴 화계사의 현판은 '대웅전', '보화루', '화계사' 세 개다.
'보화루'와 '화계사'는 대웅전 맞은편에 있는 '대방'에서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도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다.
"백두산 아래 난은 석파(흥선대원군의 호)가 최고."
스승 추사 김정희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난 치는 솜씨를 인정했다.
그래서 대원군의 그림을 '석파란'이라고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난과 함께 글씨도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화계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명부전' 현판과 명부전 기둥에 달린 '주련'의 글씨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작품이다.
그리고 '대방'에 '화계사' 현판 두 개 중 하나가 흥선대원군의 솜씨다.
나란히 있는 '화계사' 현판 중 신관호 글씨가 썩 뛰어나 보이지 않는 것은 일부러라고 한다.
산천초목도 떨게하는 흥선대원군보다 더 잘 써 보일 순 없지 않았겠냐는 세간의 평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신관호를 매우 아끼고 신뢰했다.
조대비에게 위임을 받아 섭정을 할 때, 삼군수군통제사였던 신관호를 불러들여
형조, 공조, 병조판서를 맡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법무부장관, 국토교통부장관, 국방부장관 중책을 두루 맡긴 셈이다.
이런 관계까지 생각하며 현판을 보니 스치고 지날 뻔한 것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찾아 화계사를 다시 둘러본다.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듣고 시작해 보자.
우리나라 선불교에 획을 그은 고승 중 '경허'스님이 있다.
경허스님에게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탁발을 갔다 돌아오는데 사미승이 덥다, 다리 아프다, 아직 멀었냐며 투덜댄다.
"그럼, 내가 한순간에 암자에 도착하게 해 주랴?"
그러고는 경허가 난데없이 밭을 매고 있던 아낙네를 덥석 안고 뽀뽀를 해 버린다.
그걸 본 남편이 가만있었을까? '중놈들'을 죽이겠다고 낫을 들고 달려왔으니
필사적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쳐 암자에 도착했다.
"어떠냐, 순식간에 오지 않았냐?"
경허스님은 한국 근대 불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 500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한국불교는 맥이 끊어질 위기에 놓인다.
이 맥을 살려 다시 활기를 갖게 하고 한국의 '참선' 문화를 바로 세운 사람이 경허스님이다.
경허스님을 잇는 수제자는 수월, 혜월, 만공이다.
위에 있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미승이 만공스님이다.
수월이 만공에게 그릇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그릇이라 하지 말고,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말고 한 마디 해보시게."
만공은 그릇을 마당에 던져 '깨'버린다.
'파격'. 틀에 얽매이지 않고 틀에 갇히지 않는 틀을 던져 버리는 자유로운 사고,
한국 '선'불교의 핵심 사상으로, 만공은 그렇게 명쾌한 답을 한 것이다.
한국 선불교의 수행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화두(話頭)를 붙들고 곰곰이 생각하며 본다는 뜻이다.
화두를 붙들고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을 벗어던지고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끝내 번뜩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 그것이 간화선 아닐까?
불교에 깊이가 얕은 나는 감히 그렇게 정리해 본다.
'이 뭐꼬?'
나같이 얕은 '선린이'에게 가장 흔하게 던져 주는 화두가 '이 뭐꼬?'이다.
만공스님은 만해 한용운과 함께 일제강점기 우리 불교의 정신을 지킨 대표 인물이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불교의 물을 흐리기 위해 일본식 불교를 퍼뜨린다.
결혼을 허용하며 일본의 정책에 따르는 '대처승'에게는 경제적 지원을 한다.
한마디로 친일 스님 양산에 갖은 애를 쓴다.
정신을 타락시키는 것만큼 지배하기 쉬운 길은 없으니까.
하지만 굴복하지 않은 스님들이 있었다.
일본 중처럼 타락하지 않고 우리 만의 '참선'문화를 지키기 위해
만공, 만해, 용성 등은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을 마련하며, 불교 정화운동을 펼쳐 나간다.
만공스님의 정신을 이은 제자가 고봉스님이다.
"만주에서는 독립군이 나라를 찾고자 온몸을 바치는데
나만 홀로 산중에서 열반락(열반의 고요한함)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만공스님에게 이렇게 말한 뒤 고봉스님은 승복을 벗고 속세로 나가 항일운동에 가담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8일 '대구사건'을 주도하며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다.
그때 얼마나 심하게 온갖 고문을 당했는지 감옥을 나온 뒤 평생 몸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
나이가 들자 고봉스님은 제자 숭산스님이 있던 화계사에 와서 계시다가 입적하신다.
화계중학교 정문에서 일주문으로 들어오면 오른쪽 언덕에 있는 부도밭이 있다.
잊지 말고 꼭 보고 가길 바란다.
경허-만공-고봉으로 한국 근현대 선불교의 맥을 이어온 진정한 화계사의 가치를 알게 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불교의 기본 정신을 지킨다는 것은 곧 항일을 의미하기도 했다.
만공스님과 고봉스님의 항일활동은 그렇게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화계사가 일제강점기 중요한 역사적 장소가 됐을 것이다.
1933년, 조선어학회 학자 9명이 화계사 대웅전으로 조용히 모여든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하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그러나 발각되었을 때 겪을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화계사에서 장소를 선뜻 내주었다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이러한 사건들과 노력들이 모여 36년 일제의 강제점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과 글을 잃지 않고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것이다.
화계사에 가면 '세계일화( 世界一花)'라는 말이 눈에 띈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란 뜻으로 만공스님의 정신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며,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과 같다는 의미다.
고봉스님은 제자 숭산스님에게 이른다.
"너는 세계일화에 힘쓰라."
숭산스님은 세계일화를 위해 태평양을 건넌다.
미국에서 시작, 30개가 넘는 국가에 한국 참선문화의 중심이 되는 120개가 넘는 선원을 만든다.
그리고 5만 명이 넘는 세계의 제자를 길러낸다.
숭산은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살아있는 부처(생불) 4인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
“숭산 대선사는 전 세계에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고,
100개가 넘는 선원을 건립해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에 평화와 고요를 심어줬다.”
- 미국 존 포브스 케리 상원의원
일본의 참선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한국만의 참선과 불교문화로 세계에 우리를 알린 숭산스님.
2004년에 화계사에서 입적한다.
숭산스님에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오직 모를 뿐' , '오직 할 뿐'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말라.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아무것도 집착하지 말라.
생각하는 순간 진실은 사라지고
깨닫기를 원하면 크게 그르친다.
내가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