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담아 Jan 03. 2023

솔밭공원 근처-강북구 3

서울 25개 구 길 위의 역사-구경(9경) 시리즈

솔향기 가득한 우이동 솔밭공원


서울 내에서 보기 드문 공원이다. 


놀라운 것은 이 솔밭이 조성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약 100년 넘는 1천여 그루 소나무 숲은 자연군락지이다.  1990년 아파트가 들어설 될 뻔했는데 가까스로 지켜낸 귀한 공원이란다.  이곳은 '북한산둘레길 2구간'출발점이다.  둘레길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주변에 갈 곳이 많다. 우이신설선 경전철이 생기며 솔밭공원역이 들어섰으니 접근성도 좋아졌다. 


우이동 솔밭공원-20세기 이용대상이던 나무와 숲이 21세기  '공세권', '숲세권'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도시인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 되어 가고 있다


솔밭공원역을 둘러보았다면 서라벌중학교 쪽으로 걸어보자. 국립공원 북한산 덕분에 아파트에 점령당하지 않은 우이동은 나지막한 주택들 사이 골목이 정겨운 동네이다. 솔밭공원에서 10분만 걸으면 여운형묘소가 있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라. 조금 더 오르막길을 걸으면 서라벌중학교 정문이 나온다. 그 맞은편에 묘소로 들어가는 문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 단, 개방시간은 오후 3시까지이니 늦지 않게 방문해야 한다.)

 

외진 묘소, 잊힌 정치인 여운형


여운형 묘소는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가만히 앉아 하늘을 보기 좋다.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알고 가지 않는 한 여기 묘소가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사람들 발길도 뜸해 한적하기만 하다.   


여운형묘소 - 서울 강북구 우이동 106-1에 묘소가 자리한다. 고향인 양평 신원리에는 그의 호를 딴 몽양기념관이 있다.


사실 여운형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해방 직후 여론조사 결과 여운형은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 1위, '생존인물 가운데 최고의 혁명가' 1위를 차지했다.  미군정의 존 하지도 한반도에 당장 통일정부가 들어서서 선거를 한다면 여운형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변절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국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폭넓은 국제적 시각, 활달한 성격, 뛰어난 말솜씨, 훌륭한 '피지컬'과 잘생긴 인물을 십분 활용해 인기와 신뢰를 한 몸에 받던 독립운동가였다. 여운형은 1919년 상해 '신한청년단' 대표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 낭독과 3.1 운동 때 손병희를 기독계와 연결시킨 인물도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이 관여한 우리가 알 만한 사건은 손기정의 '일장기말소사건'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우승한 사실을 일장기를 지우고  <조선중앙일보>가 1936년 8월 13일 조간으로 보도한다. 그것을 받아 <동아일보>가 8월 25일 석간에 보도했다. <조선중앙일보>가 일장기를 지우고 용감하게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은 사장이 여운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을 회유하려고 갖은 공을 들인다. 그러나 그는 일본 도쿄 한복판 제국호텔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외칠 정도로 배포있고 단호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런 까닭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들은 서울시민들이 기쁨을 안고 여운형의 집으로 달려간다. 몰려든 시민들과 함께 한 휘문중학교에서의 연설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여운형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질서 있는 일본인의 퇴장과 폭동없는 한반도 내 치안을 가능하게 했다. 여기에서도 여운형의 활약이 있었다.

 

프레임에 갇혀 버린 신탁통치 논쟁과 정치인들의 암살 


그런 여운형이 1947년 7월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한다. 이미 11번의 테러를 겪었고, 12번째 테러를 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사망 소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 국민장에 해당하는 '인민장'으로 운구가 광화문 앞을 지날 때 60만이 모여 여운형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를 운구한 112명 중에 손기정도 있었다. 


여원구묘소방문-여운형은 테러 위협으로 연구와 원구를 북한에 보냈다. 여원구는 2002년 8.15민족통일대회 북측대표로 남한을 방문했다 (c)8.15민족통일대회 공동취재단


해방 정국에서 정치 거물들이 연달아 암살당했다.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1947년 12월 장덕수 암살, 1949년 6월 김구 암살. 이런 역사적 사건은 '가짜뉴스'로부터 시작됐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는다. 

'조선독립문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논의.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

이 기사는 오보였다. 가짜뉴스였던 것이다. 


자료사진-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기사 :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기사는 오보였다. 누가 왜 오보를 했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란 말은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건드렸다. 36년 식민지가 끝난 직후였기 때문이다. 우익은 곧장 '반탁(신탁통치 반대)'을 주장한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를 지지하겠다는 좌익과 '신중론'을 주장하는 중도 우익을 향해 '찬탁(신탁통치 찬성)'이란 짧은 명명을 하고 '찬탁은 곧 매국'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이 프레임의 여론전은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치지형에 일대 메가톤급 태풍이 몰아쳤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만다. 


해방 후 전민족적 관심사는 친일청산이었다.   '반탁=애국', '찬탁=매국'이란 날선 프레임으로 우익이 여론 주도권을 잡자 여기에 슬그머니 친일파가 합승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양심을 버리고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발판삼아 사리사욕을 챙겼던 매국노이자 친일파였던 사람들이 애국자로 변신하는데 성공하고 만 것이다. 친일청산이 물 건너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모스크바 3상 회의에 참가한 주요국 미국과 소련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 미국 입장 :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후 관리할 지역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관심대상은 일본으로 점령지로 차지한다.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미, 소, 영, 중이 함께 관리하기를 원했다. 

- 소련 입장 :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한반도 내 정치세력은 공산주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즉시독립을 해도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유리했다. 그래서 신탁통치 없이 즉시독립을 주장했던 이유이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 알았다. 그랬기 때문에 우익이었던 송진우조차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라고 주장하며 반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1945년 12월 30일에 우익으로부터 암살당한다. 여운형은 모스크바 3상 회의를 지지하며 독립국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모색한다. 좌익과 우익 양측에 말이 통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도 1947년 7월 암살당한다. 역시 우익으로부터의 테러였다.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남한은 맹렬하게 좌우 극단으로 치달았다. 두 세력을 연결할 중도적인 인물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38도선을 넘었던 김구마저 1949년 6월에 암살된다. 그는 지극히 민족주의자로 우익을 대표했다. 그리고 김구가 암살된 지 딱 1년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만다. 



우이령-미아-혜화문을 잇는 이 길로 북한군이 남침해 온다. 절박했던 상황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로 오래도록 불려졌다.


일반명령 제1호였던 38도선의 미소 분할은 임시적인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의 논의는 신탁통치논의라기보다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논의였다. 이것을 '팩트'와 '국제정세'는 무시한 채 '신탁'만을 부각해 정서를 자극하자 민심은 극단적 대립으로 치달은 결과 남북한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끝내 김구가 예견했던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70년, 분단된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은 섬처럼 살고 있다. 이 시간 동안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 남북한에는 독재정부가 들어섰고, 남한에서는 친일파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풍멍하기 좋은 동덕여대 캠퍼스


솔밭공원, 여운형 묘소를 보고 난 뒤 잠깐 길을 건너 덕성여대 쪽으로 가보자. 왜냐? 북한산의 세 봉우리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이동은 소 귀 닮은 인수봉에서 유래한다. 동덕여대 교정에서는 그 인수봉을 비롯한 북한산 세 봉우리와 도봉산 오봉을 넓게 훤하게 바라볼 수 있다.


한 번에 두 개의 길을 갈 수는  없다. 인생도, 역사도. 그래서 갈림길에서의 선택이 긴 시간을 지배할 때가 많다. 잘못된 선택이었을 때는 더욱더 긴 시간을 지배하며 바로잡는데 몇 곱절의 노력과 시간이 든다. 개인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면 된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는 공동의 운명과 삶을 좌우한다.  


역사에 대한 가정은 어리석은 일이다. 냉정한 성찰만이 필요하다. 70여 년 전은 문맹률도 높았고, 미디어도 발달하지 않아 시민들의 정보는 부족했다. 어떤 의도를 가진 이들에게 여론이 조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달라졌다. . 


요즘 대한민국 여론의 흐름을 보면 모스크바3상회의 후 상황이 겹쳐진다. 분단은 우리 사회를 균형추가 없는 혹은 작동하기 어려운 70년의 역사를 갖게 했다. 대한민국도 북한도 모두 두 날개가 아닌 한쪽 날개만으로 날고 있다. 그러므로 오직 자기 이익만을 좇는 무리가 우리 공동체 운명을 결정할 권력을 쥐게 한다는 것은 재앙이다. 우리 스스로 깨어있지 않으면 역사의 비운은 반복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 도움받은강의  : 박태균(역사학자), 캐내네 스피치 <최강1교시>






작가의 이전글 해방기원일지-아부지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