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주는 안정감과 편리함은 분명하다. 먹고 싶은 걸 고민 없이 고르고, 필요한 물건을 큰 망설임 없이 살 수 있다는 건 분명한 혜택이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도 꽤 됐다. 그런데 문득, 그 익숙함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뉴욕과 서울, 두 도시가 공통으로 품은 문화는 자본을 기준으로 한 평가다. 얼마나 벌고, 어디에 쓰고, 뭘 가지고 있는지가 곧 그 사람의 서사처럼 여겨진다. 월급은 생계의 수단이라기보다 자기 증명의 방식이 됐다. 좋은 직장, 높은 연봉, 잘 차려입은 겉모습이 없으면 마치 존재의 증거가 부족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건 단지 물가나 생활수준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소비를 통해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데 익숙해져 있다.
문제는, 그런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다는 데 있다. 누군가는 적당히 일하면서도 많은 돈을 벌고, 누군가는 열심히 일해도 제값을 받지 못한다. 일의 가치는 정량이 아닌 분위기나 포장으로 결정되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허탈하다. 월급이란 이름으로 평가받는다는 것 자체가 피로하고, 거기에 정작 실질적인 공정함은 없다는 걸 느낄 때 더 그렇다.
그런 가운데 검소하게 사는 삶을 그려보면, 어쩐지 조용한 위안이 된다. 덜 쓰고, 덜 가지는 것이 나약함이 아니라 회복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 삶을 선택했다고 말하면 곧잘 따라붙는 시선이 있다. 벌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 핑계 아니냐는 의심. 그런 말 앞에 전부 아니라고는 못 한다.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리다. 중요한 건 그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무리하는 삶이 진짜 자신에게 맞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 속에서, 여전히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의 삶을 지탱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삶을 대신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 하나 단순하게 살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현실은 냉정하다. 삶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은 결국 돈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검소한 삶을 상상하다가도 다시 잔고를 확인하고 다음 월급일을 계산한다. 그 순간의 감정은 고요하지 않다. 오히려 참담하다는 단어가 더 가까울 때가 많다.
이렇게 무언가를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내려놓을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매일 줄다리기를 한다. 이상과 생계의 간극 속에서, 나는 조금씩 무뎌지고 조금씩 체념한다. 그리고 그 체념마저도 스스로 다독여야 한다. 괜찮다고, 다들 이렇게 살고 있다고. 그런 씁쓸한 감정을 품은 채로 오늘도 돈을 벌러 나간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과연 이것이 내가 원한 삶이었는지를.
어쩌면 손해가 아니라 균형일 수 있다. 소비로 눌러왔던 허세가 빠져나가고, 남는 건 단순한 시간과 평범한 호흡이다. 돈은 줄어도 삶이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 숨이 쉬어지는 속도에 따라 일상의 무게도 바뀐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결국 이 모든 생각은 하나의 감정으로 모인다. 조금은 씁쓸하고, 조금은 냉소적인 감정.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끝에 있는 게 꼭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소비만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그런 바람조차 쉽게 말할 수 없는 시대라는 데서 오는 어딘가 쓸쓸한 체념. 그럼에도, 이제는 숫자가 아닌 감각으로 삶을 재보고 싶다. 통장이 아닌 내 호흡의 깊이로, 하루의 길이로, 내 삶의 가치를 다시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