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이 아니라 경계로서의 싫음
싫어하는 것에도 철학이 필요하다. 싫음은 그냥 기분이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좋아하느냐로만 자신을 설명하려 하지만, 무엇을 싫어하느냐 역시 나의 윤곽을 만든다. 다만 문제는, 싫어한다는 말이 너무 쉽게 비난으로 흘러간다는 데 있다. 싫음은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는 감각이고, 비난은 상대를 틀렸다고 판결하려는 욕망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목적이 다르다. 싫음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경계가 될 수 있지만, 비난은 대개 나를 우월한 자리에 세우기 위한 도구가 된다.
싫음에는 많은 이유와 성찰이 필요하다. 정말 싫은가, 아니면 낯선가. 불편한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가. 위협적인가, 아니면 내 기준 밖에 있는가. 싫음을 진지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싫음은 종종 나의 무의식적 규범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질서, 내가 정상이라고 여겨온 생활방식, 내가 선이라고 생각해온 가치가 사실은 내 경험의 좁은 반경에서만 성립하는 것일 수 있다. 싫음은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경보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찰 없는 싫음은 위험하다. 내 안의 좁은 세계를 진실처럼 만들고, 그 진실을 들이대며 타인을 비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꼬투리 잡기는 그래서 쉽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말투 하나를 붙잡으면 맥락 전체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상대의 의도, 상황, 전후 관계를 읽지 않아도 된다. 말의 결만 잡아당기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나는 즉시 똑똑해 보이고, 즉시 우위를 점하고, 즉시 결론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사유가 아니라 기술에 가깝다. 삶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타인을 줄 세우는 능력이다. 게다가 이런 방식은 거의 언제나 이중잣대로 굴러간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남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실수해도 맥락이 고려되어야 하고, 남은 실수하면 그 사람 전체가 평가되어야 한다. 나는 피곤해서 그랬고, 남은 인성이 그런 거다. 내가 상처받아 날카로워진 건 이해받아야 하고, 남이 상처받아 날카로워진 건 공격성으로 규정된다. 이 이중잣대는 싫음을 윤리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싫음을 정의할 때는 늘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싫어하는 것에 이름을 붙이되, 그 이름이 판결이 되지 않게 하는 것. 나는 이게 불편하다고 말하되, 그 불편함이 곧 진리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싫어한다는 건 내 취향과 내 경험의 범위 안에서의 반응일 뿐, 내가 옳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난 게 낯설어서 싫은 것일 수 있고, 내가 잘 모르는 세계라 두려워서 싫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 감정을 한 번 더 밀어붙여 옳지 않다고 말해버린다. 싫음을 도덕으로 둔갑시키는 순간, 싫음은 경계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비난과 싫음을 분리하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싫음은 나를 설명하고, 비난은 상대를 규정한다. 싫음은 내가 어디까지 괜찮은지를 말하고, 비난은 상대가 어디까지 틀렸는지를 말한다. 싫음은 거리를 조절하지만, 비난은 관계를 파괴한다. 싫음이 진짜 경계라면 그 경계는 조용하고 단단하다. 굳이 상대를 찢어놓지 않아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키면 된다. 반면 비난은 늘 관객을 원한다. 누군가가 내 편을 들어주길 바라고, 상대가 망신당하길 바라고, 내가 정답이길 바란다. 그때부터 싫음은 내면의 감각이 아니라 외부로 던지는 무기가 된다.
싫어하는 것을 성찰하는 일은 결국 나를 찾는 일로 이어진다. 내가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수록,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도 선명해진다. 무례함이 싫다면 나는 존중을 믿는 사람일 것이고, 무책임이 싫다면 나는 신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과장이 싫다면 나는 정직을, 단정이 싫다면 나는 유연함을 소중히 여길지 모른다. 이렇게 싫음은 내 삶의 기준을 드러내는 지도다. 다만 그 지도는 내 발밑의 지형을 설명할 뿐, 세계 전체의 지형도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싫음은 남을 재단하는 칼이 아니라 나를 정렬하는 자가진단이어야 한다. 나는 이런 세계를 원한다, 그래서 이건 나와 맞지 않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더 나아가 상대를 틀렸다고 단정하고, 그 단정으로 스스로를 합리적이라 포장하는 순간, 싫음은 나의 성숙이 아니라 나의 결핍을 드러낸다. 싫음을 제대로 다룬다는 건 결국 이런 태도에 가깝다. 싫어할 자유는 가지되, 비난할 권리로 착각하지 않는 것. 내 기준을 세우되, 그 기준을 타인의 목에 걸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럴 수 있으니 괜찮고 남은 안 된다는 편리한 예외를 내 삶에서부터 걷어내는 것.
싫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세상을 더 싫어하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싫음을 덜 폭력적으로 쓰게 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