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함의 윤리

빠른 판단의 시대에, 불편함을 사유로 바꾸는 연습

by 샤누자오사무

싫어하는 것을 정의하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한 작업이다.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자신을 알아가고, 어떤 사람은 싫어함으로 자신을 알아간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내가 무엇을 못 견디는지가 더 빨리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고, 그 순간의 반응에는 내 가치관, 내 상처, 내 자존심, 내 두려움이 섞여 있다. 그래서 싫어함은 결코 가벼운 감정이 아니다. 다만 싫어함은 너무 자주 비난으로 번역되고, 그때부터 우리는 감정이 아니라 권력을 휘두른다. 싫다고 말하는 순간, 내가 옳아지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지고, 상대가 틀렸다는 판결을 내려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 편안함은 오래가지 않는데도, 우리는 그 짧은 쾌감을 자꾸 찾는다.


싫어함과 비난은 다르다. 싫어함은 내 안에서 일어난 반응이고, 비난은 바깥을 향한 공격이다. 싫어함은 경계일 수 있고, 비난은 처벌에 가깝다. 비판은 또 다르다. 비판은 대상을 해체하기 전에 이해하려는 의무가 있고, 적어도 맥락을 붙잡으려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흔히 하는 건 비판이 아니라 꼬투리 잡기다. 꼬투리 잡기는 쉬워서 문제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말투 하나만 건지면 전체 맥락을 다 지워버릴 수 있다. 사람을 문장 하나로, 문장 하나를 의도 하나로, 의도를 인격으로 줄여버리는 것. 그 단축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가능한 일이다. 이해는 시간이 들고, 시간은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니까.


거기에 이중잣대가 붙으면 싫어함은 거의 면허가 된다. 나는 예민할 수 있고, 나는 실수할 수 있고, 나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지만, 남은 그러면 안 된다는 태도. 내 불편함은 섬세한 감수성이고, 남의 불편함은 유난이고, 내 단정은 소신이고, 남의 단정은 선동이 된다. 그 순간 싫어함은 자존심을 세우는 도구로 바뀐다. 내가 불편한 건 세상이 잘못된 증거가 되고, 내가 싫어하는 건 그 대상이 옳지 않다는 판결이 된다. 하지만 어떤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내가 옳다는 뜻이 아니다. 싫어함은 진실의 증명이 아니라 나의 위치를 보여주는 신호일 뿐이다. 내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난 것이 싫을 수도 있고, 내가 이해할 준비가 안 된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때 필요한 건 판결이 아니라 점검이다. 이 불편함은 무엇을 지키려는 신호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반응인가, 혹은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한 영역인가. 싫어함을 사유로 바꾸는 순간, 나는 상대를 때리는 대신 나를 더 정확히 읽게 된다.


사람들은 싫어함을 공유하면서 친밀해진다. 나도 싫어, 나도 그거 별로야, 그 말 한마디가 관계를 빠르게 묶어준다. 문제는 그 친밀감이 비난을 공유하는 친밀감으로 변할 때다. 누군가를 함께 까는 관계는 빨리 뜨거워지지만, 그만큼 빨리 식는다. 그 온도는 애정이 아니라 흥분이고, 연대가 아니라 배설에 가깝다. 싫어함을 나누는 건 가능하다. 다만 그 나눔이 마녀사냥으로 묶이면 안 된다. 싫어함은 내 경계를 세우는 언어로 남아야지, 누군가를 몰아붙이는 도구로 변하면 그 순간부터 관계도 삶도 거칠어진다. 결국 그 거칠음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오늘 내가 쉽게 던진 비난의 언어는 내일 내가 나를 때리는 언어가 되기 쉽다.


사유가 필요하다는 말은, 멋있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유는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자기관리다. 부정적인 생각을 꼭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다. 말하는 순간 시원해지는 감각이 있지만, 그 시원함은 대부분 중독을 남긴다. 더 자주 말하게 되고, 더 강한 표현을 찾게 되고, 더 많은 대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먼저 망가진다. 내 세계가 점점 비난으로 조직되기 때문이다. 싫어함을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싫어함을 무조건 밖으로 던지는 습관은 내가 나를 좁히는 습관이 된다. 싫어함은 공유의 재료가 아니라 이해의 출발점이 될 때 더 건강해진다.


사는 게 팍팍해질수록 사람들은 빠른 판단을 원한다. 여유가 없을 때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부담이 된다. 그래서 선입견은 꽤 그럴듯한 생존 전략처럼 보인다. 몇 초 만에 상대를 분류할 수 있고,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준다. 특히 다양한 배경이 뒤섞인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틀릴 가능성이 높아도 빠르니까, 정확하지 않아도 당장은 편하니까. 하지만 그 지름길은 결국 내 삶을 더 좁힌다. 이해를 포기한 태도는 언제나 생각의 단축이고, 생각의 단축은 결국 내 감정의 스펙트럼도 단순하게 만든다. 결국 남는 건 싫어함뿐이고, 그 싫어함은 쉽게 혐오로 번진다.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지는 게 다정함이다. 큰 목소리로 정의를 외치지 않고, 단정한 결론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고, 조금 느리더라도 맥락을 보려는 태도. 심심해 보일 만큼 조심스럽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까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려는 자세. 그 다정함은 약함이 아니라 힘이다. 버틸 힘이 있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윤리다. 싫어함을 느끼되 비난으로 가지 않는 힘, 불편함을 감정의 무기로 쓰지 않는 힘, 빠른 판단의 유혹을 견디고 한 번 더 생각하는 힘. 그게 지금 같은 시대에 내가 기르고 싶은 능력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내 세계를 거칠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좋음을 길게 말하는 연습이 삶을 밝힌다면, 싫어함을 정확히 다루는 연습은 삶을 망치지 않게 한다. 싫어함은 나의 경계를 알려주는 감각이고, 비난은 그 경계를 타인을 때리는 몽둥이로 바꾸는 일이다. 나는 경계를 세우되 몽둥이를 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내가 찾는 사유의 방향이고, 다정함이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사유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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