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선택을 복제하는 일

실패를 피하려다 삶을 복제하는 것에 대하여

by 샤누자오사무

크리스마스 연휴의 프라하에서, 사람들은 어쩐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식으로 앉아 있었다. 잘 알려진 식당, 잘 알려진 테이블 간격, 잘 알려진 메뉴 구성이었다. 나도 그 식당이 유명하다는 걸 알고 갔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아 고개를 조금만 돌리자, 그 추천이 복제되어 있었다. 비프 타르타르와 카르파초. 생고기와 생고기. 둘 다 비슷한 결의 음식인데도 한 테이블이 아니라 가게 전체가 그 두 접시를 번갈아 먹고 있었다. 적어도 하나만 시켜서 생고기의 맛을 확인하고, 나머지는 다른 쪽으로 가볼 수도 있지 않나.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날의 프라하에서는 그런 생각이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돼지 껍데기와 푹 고은 소 양지를 시켰고, 갑자기 튀는 사람이 됐다. 음식이 튄 게 아니라 선택이 튄 것이다. 멀리까지 시간 내서 왔고 실패의 기회비용이 크다는 건 안다. 그런데 다 같이 같은 실패를 피하려고 다 같이 같은 경험을 사는 풍경은, 신기하면서도 슬펐다. 추천을 따라 한 접시를 시켜보는 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용기다. 낯선 도시에서 내 실패를 줄이려는 마음이 비겁함만은 아니니까. 문제는 그 용기가 어느 순간 습관이 되고, 습관이 규칙이 될 때다.


한 개인의 의견은 존중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의견이 인기와 노출의 추진력을 얻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정답처럼 유통될 때다. 자기 경험을 말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인데도 그 문장을 규정처럼 받아 적는다. 더 위험한 건, 전문가조차 일반론의 유혹에 빠진다는 점이다. 이러이러한 걸 아니까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도 된다, 그럴 수 있다, 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편하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편하다. 소셜미디어는 생각의 깊이를 증명하지 않는다. 노출 빈도를 증폭시킬 뿐이다. 그리고 그게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며, 플랫폼이 의도한 구조일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더 잘 팔리는 주제가 있다. 해외가 어떻더라, 어디가 살기 좋더라, 여행은 이렇게 해야 하더라. 관심이 몰릴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더 중요한 질문은 그 사람이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가다. 왜 우리는 판단을 위임하면 안도하는가. 왜 우리는 내 경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론을 먼저 저장하려는가.


문제는 더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조건은 도시마다 다르고, 제도도 다르고, 사람의 표정도 다르다. 그런데 한 도시의 체감이 마치 나라 전체의 평균처럼 포장된다. 일반화하기 좋은 소재를 만들다가, 어느 순간에는 부정적인 것만 과장해서 부각한다. 해외도 마찬가지다. 어떤 곳을 한 장의 엽서로 만들고, 그 엽서가 또 다른 나라의 기준이 된다. 지도는 넓은데, 요약은 너무 빠르다. 빠른 요약은 편하고, 편함은 곧 신념이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세계를 보는 게 아니라, 세계를 축약한 문구를 소비한다. 그 문구는 잘 팔리고, 잘 공유되고, 그래서 더 크게 들린다. 하지만 크게 들리는 것이 더 넓은 것은 아니다. 크게 들리는 건 대개 더 반복된 것이다.


여기서 더 답답한 지점이 생긴다. 반박하는 사람들도 결국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어디 살아보니 아니던데, 어디어디서 몇 년을 경험했는데, 내가 겪어본 건 아니던데, 내가 아는 사람은 안 그러던데. 이 문장들은 반박처럼 보이지만, 많은 경우 자기 경험을 또 하나의 표준으로 세우는 방식이다. 상대의 일반화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일반화를 더 권위 있게 제출한다. 그리고 그 권위는 종종 경험의 양으로 포장된다. 내가 더 살아봤으니, 내가 더 많이 봤으니, 내가 더 힘들고 아프게 겪었으니, 그래서 내가 이길 자격이 있다. 비판의 형태를 띠지만 목적은 승리에 가깝다.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도, 꼭 꼬투리를 잡아 아니라고 말해야 직성이 풀린다. 단어 하나에 꽂혀 전체 맥락을 버리고, 문장 하나를 꺾어 상대를 무릎 꿇리는 데서 쾌감을 얻는다. 나는 그럴 수 있지만 남은 안 된다는 이중잣대가 작동하고, 그 이중잣대가 대화를 논쟁으로 바꾸고, 논쟁은 다시 집단의 전쟁으로 번진다. 크게 들리는 목소리와, 더 크게 이기려는 목소리가 서로를 키우며 돌아간다. 그 사이에서 사라지는 건 맥락과 온도다.


맛집도, 꼭 가봐야 할 관광지도, 결국은 내가 별로면 별로고 아니면 아닌 것일 뿐이다. 내 취향의 경계 안에서만 말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느꼈다, 이 정도가 적당하다, 내겐 이게 맞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한정의 문장을 잘 못 쓴다. 대신 추천을 규칙으로 만들고, 반박을 판결문으로 만든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같은 추천을 받아 같은 식당에 가서 같은 메뉴를 먹고 같은 사진을 찍고 같은 문장을 쓴다. 웃기다. 그런데 슬프다. 각자의 선택과 경험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각자의 삶도 존중하지 못한다. 취향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속도를 존중하는 법도 배우기 어렵다. 그리고 존중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시끄러운 확신뿐이다.


나는 프라하에서 돼지 껍데기를 씹으며, 그 시끄러운 확신들 사이에서 내 작은 선택을 지켜내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느꼈다. 멀리까지 와서 실패하기 싫다는 마음, 남들이 다 시키는 걸 안 시키면 내가 잘못된 것 같은 마음, 나만 다른 메뉴를 시키면 내가 괜히 튀는 것 같은 마음. 그 마음들은 결국 내 안에 있는 불안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나, 내가 지금 손해 보고 있나, 내가 지금 뒤처지고 있나. 추천과 반박이 잘 팔리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불안을 잠깐 멈추게 해주기 때문이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면 내 선택이 잠깐 면책된다. 누군가를 반박해서 이기면 내 불안이 잠깐 우월감으로 바뀐다. 둘 다 오래가는 해결책은 아니다. 둘 다 소음을 잠깐 다른 소음으로 덮는 일이다.


그래서 연습해야 하는 건 선명한 기준을 만들되, 그 기준을 타인에게 법처럼 들이밀지 않는 태도다. 삶이 고통스러워도 나다움은 내가 결정하겠다는 자세. 안전한 무균실에 보관된 삶은 깨끗할지 몰라도, 결국 내 것이 아니다. 상처가 생기더라도 내 세상에 남겠다는 건, 나를 함부로 위임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크게 들리는 것을 곧게 듣되, 그 목소리에 내 삶의 키를 맡기지 않는 것. 반박의 쾌감이 올라올 때, 그 쾌감이 내 마음을 더 좁히는지 넓히는지 먼저 묻는 것. 추천을 받더라도 한 접시는 내가 고르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경험을 들을 때, 그 경험이 내게 주는 건 결론이 아니라 단서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추천을 따르는 날도, 비켜가는 날도 결국 내가 고른 날이어야 한다. 그럴 때만 경험은 복제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인생의 실패를 피하려고 인생 자체를 복제한다. 그런데 실패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내 이야기가 생기지 않는다. 내 이야기는 내가 결정한 선택에서 나온다. 때로는 추천을 따르고, 때로는 추천을 비켜가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서. 그 작은 결정들을 쌓아가는 일이 결국 나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런 결심을 한다. 누구의 말이 크게 들리든, 내가 크게 살겠다. 크게 살겠다는 건 요란하게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 선택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내 삶을 안전한 전시장에 걸지 않고, 내 삶의 흙바닥 위에서 계속 써 내려가겠다는 뜻이다.


작가의 이전글나이의 무게를 다루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