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평균치가 얼굴이 될 때

내가 남기는 것은 정보인가 태도인가

by 샤누자오사무

본업이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어떻게 하루에 그렇게 많은 의견을 낼 수 있지. 누군가는 아침부터 밤까지 글을 쓰고, 캡처를 모으고, 링크를 옮기고, 결론을 붙인다. 정보 공유라는 이름을 달면 그럴듯해진다. 그런데 오래 보다 보면 알게 된다. 전달하는 건 정보가 아니라 기분일 때가 많다. 그 기분이 반복되면, 그 사람의 세계관처럼 굳는다.


어떤 사람의 피드는 늘 ‘심판석’에 앉아 있다. 365일 채점하고, 평가하고, 판정을 내린다. 누가 뭘 했는지보다, 누가 얼마나 부족한지가 더 중요한 뉴스가 된다. 칭찬은 짧고 비난은 길다. 비난은 저장되고, 분노는 업데이트된다.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성실함이다. 놀라울 정도로 꾸준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기 타임라인을 냉소로 덮는다. 그러다 보면 피드가 아니라 기류가 된다. 보는 사람도 그 기류에 잠깐씩 젖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왜’다. 왜 그렇게까지 의견을 얹는가. 많은 경우 그 이유는 대단하지 않다. 그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다. 내가 세상을 읽고 있다는 걸, 내가 뒤처지지 않았다는 걸, 내가 무지한 편에 서 있지 않다는 걸. 그러니까 말은 점점 공격적으로 된다. 공격성은 존재감을 키워주는 가장 빠른 도구니까. 이건 ‘사회적 relevance’를 증명하려는 강박에 가깝다. 안타깝게도 그 방식은 타인의 결함을 소비하는 형태로 굳기 쉽다.


물론 비판은 필요하다. 문제를 드러내고, 권력을 견제하고, 피해를 줄이려면 말해야 한다. 다만 비판이 ‘생활’이 되는 순간부터는 다른 얘기다. 비판이 습관이 되면, 목적이 뒤집힌다. 무엇을 바꾸기 위해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기 위해 문제를 고른다. 그리고 그때부터 비판은 정의가 아니라 자기 관리가 된다. 내가 화가 나 있어야 내가 깨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내가 조롱해야 내가 밀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 그 상태는 결국 본인을 가장 먼저 좀먹는다. 분노는 타인을 겨냥한 것 같지만, 대부분은 내 하루의 표정을 먼저 망친다.


반대로, 그 소란 속에서도 자기 자리에서 작은 행복을 캐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세상이 망하라고 주문을 외우는 타임라인 한복판에서, 점심에 먹은 돈가스를 찍어 올리고, 오늘의 산책을 기록하고, 작은 성취를 적는다. 예전엔 이런 게 자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게 보인다.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도, 그 사람은 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의 몸을 굴리고, 오늘의 시간을 지나가게 하고, 오늘의 기분을 회수한다. 그게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든다.


같은 알고리즘 안에 있어도 어떤 사람은 흙탕물에서 허우적대고, 어떤 사람은 그 파도를 탄다. 이 대비가 불편한 이유는, 행복이 꼭 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환경과 조건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작은 감각을 기록하고, 작은 회복을 의도하는 일. 그건 타고난 낙천성이 아니라 기술에 가깝다. 기술은 연습할 수 있다. 연습하지 않으면, 분노가 자동 실행이 된다.


결국 사회적 자아는 프로필 사진이 아니라, 그 사람이 반복해 내뱉는 말들의 평균치로 만들어진다. 익명 뒤에 숨어 있다고 생각해도, 말은 남는다. 선택한 단어가 남고, 반복한 태도가 남는다. 그게 그 사람을 설명한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이 망해야 내 마음이 편한 사람인지. 타임라인을 조금만 내려보면 알 수 있다. 피드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여기서 내가 제일 경계하는 건, 이 말을 쓰는 내가 또 다른 심판석에 앉는 일이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건 가장 쉬운 유혹이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을 ‘저 사람들은 문제다’로 두고 싶지 않다. 결론은 더 불편해야 한다. 말이 나를 만든다는 사실. 내가 던지는 문장이 결국 내 얼굴이 된다는 사실. 그러니 오늘의 말이 누군가를 갈아 넣어 만든 존재감인지, 아니면 나와 타인을 동시에 살리는 말인지, 최소한 한 번은 확인해야 한다. 비판이 필요한 시대일수록, 비판하는 방식에 대한 자각이 더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비판하는 대상들과 같은 모양이 된다. 다만 더 말 잘하는 버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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