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덜 극단적인 곳에서 조금 더 사람답게
올겨울 뉴욕을 비롯한 미국 동부는 눈폭풍으로 난리다. 십수 년 만에 온 폭설과 추위라는 말이 붙은 사진들이 계속 올라온다. 화면이 하얗다. 거리도, 차도, 건물의 어깨도, 사람들의 모자 위도. 내가 떠나기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까지 춥지 않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미화된 건지, 도시가 진짜로 더 극단으로 가는 건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그 하얀 뉴욕 안에 지금의 내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다는 거다.
예전의 나는 그 풍경 안에 있었다. 눈이 오면 발목까지 젖어가며 걷고, 지하철이 지연되는 걸 욕하면서도 결국은 그 도시의 속도로 다시 밀려가던 사람. 그런데 이제는 흰 화면을 보면서도, 몸이 그 추위를 먼저 떠올리지 않는다. 대신 조금 멀리 서서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그 도시에 있었던 시간은 분명히 길었는데, 그 긴 시간이 어느새 과거의 계절처럼 접혀 버린 느낌. 그럼에도 동시에, 내가 이곳에 정착한 지도 벌써 한 계절이 흘렀다는 걸 체감한다.
나는 해가 짧아지는 중간에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지금은 해가 길어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시간이 흐른다는 게 느껴진다. 그동안은 비가 너무 오래 왔다.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 비가 계속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로 비가 그치고 해가 난다. 해가 나면 빨래가 잘 마른다. 기온은 비슷한데 공기가 따뜻하다. 같은 온도인데도 몸이 다르게 받아들이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사람도 그렇겠지. 겉으로는 별 차이 없어 보여도, 빛이 달라지면 마음이 달라지는 것처럼.
문득 그런 질문을 해본다. 나는 뉴욕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나. 중요한 건 아닌데, 가끔 궁금해진다. 다양한 톤의 검은 옷들만 봐도 적응을 잘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디든 그렇겠지만, 뭣 모르고 뉴욕에 오는 건 생각보다 쉽다. 도시는 큰데, 사람은 늘 “일단”이라는 단어로 버틸 수 있다. 일단 가보자, 일단 살아보자, 일단 해보자. 그런데 떠나는 건 다르다. 떠나는 건 일단으로 되지 않는다. 수많은 고민을 동반한다. 나를 만들었던 도시를 등지는 결정은, 내가 그 도시에서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무겁다. 익숙함을 떠나는 건 늘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붙잡는다.
헤맨 만큼 내 땅이라면 나는 중부도 동부도 살아본 셈이고, 영국으로 그 넓이를 더 넓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다음엔 어디로 가게 될까, 어떻게 살게 될까’를 막연히 그리며 또 헤매려 들겠지 싶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정착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이동을 꿈꾼다. 어느 한 곳에 가만히 있으면 내가 굳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너무 많이 움직이면 내가 텅 비어질까 봐 또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 사이에서 우리는 늘 중간쯤을 찾는다.
겨울이 없는 곳으로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 겨울은 여전히 좋다. 눈이 내리고, 공기가 날카로워지고, 목도리를 고쳐 매는 계절은 사람을 조금 단정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사계절을 찾아 떠나기도 할 것이다. 계절이 담기는 창가에 익숙해져서, 계절로 일 년이 지나갔다는 걸 알곤 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그 변화가 그렇게 뚜렷하진 않다. 그런데도 여기도 분명 계절은 있고 시간은 흐른다. 봄을 더 감사하게 되지 않더라도, 혹독한 겨울이 없어서 더 괜찮을 수도 있다. 삶이 꼭 극단을 통과해야만 의미를 얻는 건 아니니까. 무사히 지나가는 계절이야말로, 어쩌면 정말로 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런던에 오면서 연봉을 절반 가까이 깎았는데, 일하며 살다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돈을 덜 벌면 불안이 더 커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였다. 저녁이 있고, 해가 나면 나가서 걸을 여유가 생겼다. 미팅이 없는 오후에는 테니스를 칠 수도 있고, 점심을 제대로 차려 한 시간씩 먹을 수도 있다. 출근을 해도 팀원끼리 같이 점심을 먹자고 강요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종종 바깥으로 나가 함께 걷는다. 이런 삶이라니. 나도 몰랐다. 내가 원했던 건 어쩌면 더 많은 숫자가 아니라, 더 많은 숨이었을지도 모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정말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대개 아주 작게 생겼다. 퇴근 후의 빛,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는 점심, 어깨가 덜 올라간 하루, 주말에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조용한 감각. 이런 건 어디서나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어떤 도시에서는 너무 비싸게 느껴진다. 비용이 돈만이 아니라 체력과 시간과 마음이라는 형태로 청구되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곳이 나를 완전히 바꿔주는 건 아니다. 새로운 곳으로 가도 여전히 나다. 나의 습관, 불안, 방식은 나의 어딘가에 아직 새겨져 있어서 지역을 바꾼다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배경만 바뀌고 주인공은 그대로라면, 같은 장면이 반복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도 환경을 바꾸면 찾아오는 변화가 분명히 있다. 내가 덜 소모되는 구조에 들어가면, 내 안에서 다른 부분이 살아난다. 늘 긴장하던 사람이 조금 느슨해지고, 늘 서두르던 사람이 조금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된다. 그 변화는 극적이지 않아서 더 진짜 같다.
나는 아직 확신을 다 갖고 있지는 않다. 이곳이 영원한 종착지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해가 길어지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더 괜찮아졌다는 걸 안다. 뉴욕의 하얀 겨울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 그 추위를 그리워하기보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혹독한 겨울이 없어서, 봄이 덜 감동적일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 매일이 덜 힘들어서 더 살만할 수도 있겠구나.
그게 나의 새로운 기대고, 아주 조심스러운 확신이다. 어디에 있든 결국 나를 데리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나를 덜 닳게 만드는 곳에서 나를 조금 더 잘 써보고 싶다. 해가 길어지는 방향으로. 내 하루가 조금 더 길어지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