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공동체

우월감으로 만든 소속이 왜 폭력을 부르는가

by 샤누자오사무

가장 위험한 순간은 내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이, 내가 누구를 미워할 수 있는지로 바뀔 때다. 어떤 사람들은 소속을 통해 안정을 얻는다. 흔들리는 세계에서 내가 설 자리를 마련해주니까. 문제는 그 소속이 관계의 언어가 아니라 우월의 언어로 굳어질 때다. 우리는 종종 집단을 자아처럼 다루고, 자아를 집단처럼 과장한다. 그 순간부터 판단은 단순해진다. 우리 쪽은 옳고, 저쪽은 틀리다. 우리 방식은 고상하고, 저들의 방식은 저열하다. 무엇이든 이 틀에 넣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편해진 만큼 위험해진다. 생각이 줄어드는 대가로, 폭력은 쉬워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층위를 가진다. 계급, 지역, 성별, 세대, 언어, 피부색, 직업, 교육, 몸의 조건, 종교, 정치적 경험, 가족의 역사. 이 층위들은 서로 얽혀서 한 사람의 삶을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단일한 라벨로 사람을 설명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집단의 논리가 앞서면, 사람은 한 장짜리로 재단된다. 너는 우리인가, 너는 적인가. 그 질문 하나로 모든 맥락이 증발한다. 맥락이 사라지면 윤리도 함께 사라진다. 남는 건 충성의 경쟁뿐이다. 누가 더 우리 편다운가. 누가 더 강하게 외치는가. 누가 더 과감하게 상대를 밀어내는가.


문제는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이 대체로 선해 보인다는 데 있다. 정의, 질서, 전통, 도덕, 안전, 상식, 진보, 혁명. 어떤 단어든 가져다 붙일 수 있다. 단어가 선하면 내용도 선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단어의 선함은 행위의 선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집단은 선한 단어를 더 잘 쓴다. 선한 단어는 면죄부가 되기 때문이다. 면죄부가 생기면 사람은 더 쉽게 잔인해진다. 나는 옳은 편에 서 있으니, 이 정도는 해도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그 마음이 폭력의 시작이다.


이런 집단이 특히 취약한 지점은 타인의 삶을 단일한 이야기로 환원하는 습관이다. 세계는 복잡한데, 그들은 단순한 서사를 원한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순수하고 누가 타락했는지, 누가 우리이고 누가 적인지. 단순해질수록 행동은 빨라지고, 행동이 빨라질수록 책임은 흐려진다. 그래서 그들은 늘 결론부터 말한다. 맥락은 사치로 취급된다. 누군가가 여러 조건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다. 불편하니 지워버린다. 불편을 지우는 순간,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상징이 된다. 상징은 쉽게 처벌할 수 있다. 사람은 처벌하기 어렵지만, 상징은 쉽다.


여기서 우월감은 외부를 향한 공격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내부도 망가뜨린다. 절대 기준을 가진 집단은 내부의 작은 차이를 견디지 못한다. 순도 검사를 시작한다. 누가 더 진짜인지, 누가 더 충실한지, 누가 덜 섞였는지. 그 과정에서 공동체는 더 단단해지는 게 아니라 더 좁아진다. 다양성을 불순물로 규정하는 순간, 공동체는 현실과 단절된다. 현실과 단절된 집단은 스스로의 환상 안에서만 살아간다. 그 환상은 위기에 강해 보이지만 사실 위기에 가장 약하다. 현실이 한 번만 어긋나도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집단은 위선에 취약하다. 내부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내세운 규칙을 어길 때, 일반 구성원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 조용히 눈을 감거나, 더 큰 적을 만들어 분노를 바깥으로 돌린다. 규칙이 진짜 규칙이었다면 내부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거의 그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규칙이 목적이 아니라 정체성의 장식이었기 때문이다. 규칙은 남을 재단하는 도구였지, 스스로를 묶는 굴레가 아니었다. 그 순간 공동체는 도덕이 아니라 권력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도덕을 말하던 사람들이 결국 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스스로 선하다고 믿는 권력은 가장 잔인해질 수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는 인식의 실패다.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실패. 내가 믿는 가치가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실패. 인간은 누구나 자기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문제는 그 출발점을 종착점으로 착각할 때 생긴다. 삶을 살아가며 배워야 하는 건 바로 그 착각을 교정하는 일이다. 내 언어가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질서가 누군가에게는 억압일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정상이라 부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배제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사실. 이런 것들을 견디는 능력이야말로 성숙이다. 그 능력이 없는 집단은 결국 자기 확신으로만 움직이고, 자기 확신이 커질수록 타인의 생존 공간은 좁아진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질문으로 판단하고 싶다. 너희는 스스로를 의심할 수 있는가. 너희는 타인의 조건을 상상할 수 있는가. 너희는 네가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동시에 네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들고 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폭력을 낳는다. 당장은 화려한 구호와 단단한 결속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결속은 대개 공포와 배제로 유지된다. 그리고 그 공포와 배제는 언젠가 반드시 밖으로, 혹은 안으로 터진다.


진짜로 필요한 건 정답 공동체가 아니다. 정답을 독점하지 않는 공동체다. 자기 진영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남을 악마화하지 않는 공동체다.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준을 조정할 줄 아는 공동체다. 그런 공동체는 느리고 시끄럽다. 합의는 번거롭고, 질문은 계속되고, 결론은 늦게 나온다. 하지만 그 번거로움이 바로 인간 사회의 비용이다. 그 비용을 내지 않으려는 순간, 우리는 더 큰 대가를 치른다. 폭력이라는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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