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 공장에서 일하기

by Luckyjudy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듣는 말이 있다.

"그건 규정에 없습니다."

"이건 규정을 보완해야겠네요."

"그럼 프로세스 만들죠."


문제가 생기면 규정을 만든다.

문제가 또 생기면, 그 규정을 다시 고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부칙이 늘고, 단서 조항이 붙고, 문서는 37페이지가 된다.


그리고 인사팀 문서함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규정들이 층층이 쌓인다. (가끔은... 내가 만든 규정인데 나도 기억이 안 남)


왜 회사는 이렇게 '문제 = 규정'이라는 공식을 사랑할까?



1. 책임을 개인이 아닌 문서에게 넘길 수 있어서

조직에서 책임은 뜨겁다.

누가 들고 있으면 손이 데인다.


So, 모두 외친다.

"이렇게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진짜 번역은 이거다.

"제가 정한 거 아니고요, 여기 문서에 적혀 있다고요."


규정은 책임의 화살을 사람 → 문서로 돌려준다.

HR은 이 방패를 들고 회사의 포탄을 다 맞는다.


2. 규정은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가장 쉬운 도구

사람 문제는 복잡하고 감정적이다.

반면 규정은 단순하다.


A면 B.

B면 C.


아주 깔끔!

그래서 임원들은 말한다.


"이건 규정 하나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현장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

A 같은 B, B 같은 C...


사람 문제는 규정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규정은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착시를 준다.


3. 규정은 만들 때 가장 멀쩡하다 - 그리고 정부도 똑같다

실제로 규정이라는 존재는 만들 때가 가장 예쁘다.

특히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만들수록 더 화려하다.


금지합니다.

위반 시 불이익 있습니다.

이 절차를 따르세요.


종이 위에서는 언제나 이상적이다.


심지어 정부도 문제 생기면 규정을 만든다.


어디선가 사건이 터지면, 정부는 즉시 이렇게 외친다.


"관련 규정 정비하겠습니다!"

"가이드라인 마련하겠습니다!"

"관리감독 강화하겠습니다!"


회사는 리스크를 피하려고 규정을 만들고, 정부는 책임을 피하려고 규정을 만든다.

그 사이에 HR은 뭐가 되냐면...


➡️ 회사 규정 + 정부 지침 + 감독 기준

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

'규정 3중 압박' 담당자가 된다.


그래서 HR은 점점 더 많은 문서를 관리하며, 책상 위에는 정부 공문이 쌓이고, "근데 이건 어떤 기준으로 대응해야...?"라며 혼돈의 카오스다.


4. 규정만 늘어나면 조직은 '규정 중독'이 된다

문제 생김 → 규정 추가

규정 모호함 → 단서 조항 추가

또 문제 생김 → 지침 추가

FAQ 길어짐 → 새 규정 신설


그 결과,

현장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HR은 설명하고 싶어도 기억 안 나고,

직원은 규정대로 해달라고 따지고

노동조합은 규정을 내놓으라고 한다.


규정은 늘어나는데 판단력은 줄어든다.

조직은 '생각하지 않는 조직'이 된다.


5. 대부분의 문제는 규정이 없어서 생기는 게 아니다

HR이 현장에서 느끼는 진짜 원인은 이거다.

문제의 80%는 규정 부재가 아니라 '문화 부재'다.


태도 문제

감정적 리더십

부서 간 갈등

소통 부족

책임 회피 등등


"규정은 너희가 지켜, 난 케바케로 다룸" 스타일 관리자라면, 이런 조직에 규정을 10개 추가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근본 문제는 '사람'과 '문화'다.

그게 안 바뀌면 규정은 모래 위에 쌓는 탑이다.


6. 그럼에도 HR은 오늘도 규정을 만든다

왜냐고?

위에서는 늘 이렇게 묻기 때문이다.

"왜 아직 정리 안 됐죠?"

"대책은요?"

"문서로 남겼나요?"


그리고 정부에서도 끊임없이 공문이 온다.

"관련 절차 정비 권고"

"표준 가이드라인 적용 요청"

"사례집 참고 바랍니다"


HR은 결국 현실적으로 가장 빠른 도구인 규정을 접속한다.



마무리: 규정은 '치료제'가 아니다


규정은 임시로 속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고치지는 않는다.


회사가 건강해지려면 규정이 아니라 사람, 문화, 리더십이 바뀌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 HR은 또 규정 문서를 업데이트한다.

왜냐면 누군가는 해야 하고 그 누군가가 보통 HR이기 때문이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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