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견학이나 소풍으로 몇번씩은 방문했을 공간이지만, 정작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주 오지 않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는 계단은 완만한 경사로 방문객들을 맞이합니다.
관람객들이 늘 마음 편하게 들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옆으로 연못이 보입니다.
연못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커서 작은 호수가 알맞아 보입니다. 화창한 날에 하늘빛보다 더 짙은 빛깔을 띠고 있는 고요한 호수의 모습을 보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며 박물관 입장을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명화들을 50여 점을 전시하는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 시절까지의 회화 작품들을 시대순으로 전시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감상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특정한 한 명의 작가가 아니라 여러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할 때는 구성에 따라 산만해질 수도 있는데, 이번 전시는 시대별 흐름에 따라 깔끔하게 기획되어 있어 동선에 맞춰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전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각 시대별로 작품을 모아 구획해 놓았는데, 공간별로 벽에 적힌 짤막한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 설명을 읽고 감상하면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직전 런던 여행을 다니면서 내셔널 갤러리를 두번 방문했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설레는 기분으로 전시장에 들어섰습니다.
사람의 인상을 결정지을 때 첫인상이 중요하듯 전시의 전체적인 인상은 전시실로 첫 발을 내디뎠을 때의 인상이 큰 영향을 줍니다.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의 말을 인용한 글귀가 벽면에 띄워져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고 인간 중심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한 시대이지만 여전히 예술 작품의 주된 소재는 성경과 신화 속 이야기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가 인간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거기에 담긴 정신은 여전히 '신' 중심의 시대였음을 되새기게 하는 미켈란젤로의 글귀와 함께 전시가 시작됩니다.
<성모자와 세례 요한>, 라파엘로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수많은 예술가들 중 라파엘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라파엘로는 수려한 외모와 빼어난 실력으로 당대에 아이돌처럼 높은 인기를 얻은 예술가였지만 37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아쉬움이 남는 화가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세례 요한의 모습이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 속에 평화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르네상스 회화 작품에서 거의 항상 푸른색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푸른색의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의 인자한 모습이 돋보입니다.
라파엘로 작품엔 안정감이 있어 감상이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편안함과 안정감이 시대를 넘어 많은 관람객들을 만족스럽고 흐뭇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번 특별 전시에게 가장 인기 많은 작품을 꼽자면 카라바조의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과 토머스 로렌스의 <찰스 윌리엄 랜튼 초상화 (레드보이)>입니다.
이번 전시를 홍보하는 포스터, 팸플릿 등에 자주 본 그 작품들입니다.
카라바조,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바로크 시대 작품들 사이에 중심을 잡고 있는 카라바조의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입니다.
카라바조의 삶을 살펴보면, 범죄를 저지르고 나라에서 추방되는 등 평탄하지 않은 생애를 보냈지만예술가로서의 회화 솜씨만큼은 너무나 빼어났습니다.
빛을 활용한 능력이 뛰어나고 특유의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작품 속에 온전히 담겨 있는 덕분에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로 사람들에게 회자됩니다.
그림을 보면 마치 방금 막 도마뱀에게 물린 듯한 동작과 표정이 인상 깊습니다. 연극적인 표정이나 역동적인 동작을 특색으로 하는 바로크 회화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가족 단위 방문객들도 많았는데 어린아이들이 가장 재밌어하는 그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깜짝 놀라고 있네"
"어, 도마뱀한테 물렸어!"
역동적이고 표현력 풍부한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만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토머스 로렌스, <찰스 윌리엄 랜튼 (레드보이)>
또 다른 인기작인 '레드보이'입니다. 토머스 로렌스가 그린 강렬한 색감의 초상화 작품 속에는 한 소년이 해안가에 달빛을 받으며 앉아 있습니다.
말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보아 귀족 자제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모습인데 빨간 옷이 새하얀 얼굴과 하얀 장식에 대비되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달빛이 환하게 내리는 밤바다에서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귀엽다는 모습보다는 인생 N회차의 사연 많은 표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꾼들이라면 야심한 밤에 달빛 아래 앉아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영감을 받고 사연 많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 터너,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은 윌리엄 터너의 작품이었습니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도 직접 봤던 작품인데 서울에서 다시 보니 반가웠습니다.
그림은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아프로디테 사제인 헤로와 바다 건너 마을에 사는 청년 레안드로스는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레안드로스는 헤로를 만나러 밤마다 해협을 헤엄쳐 건너오고 레안드로스는 헤로가 길을 잃지 않도록 등불을 켜둡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폭풍으로 헤로의 등불이 꺼지고 레안드로스는 목적지를 찾지 못해 탈진해서 죽고 맙니다. 죽은 레안드로스의 모습을 보고 헤로도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내셔널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 어떤 대상을 그린 것이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거센 풍랑의 모습, 하늘과 바다가 뒤섞여 있는 장면, 어두운 달밤과 무언가 다급해 보이는 분위기를 통해 어느 비극적인 이야기의 한 부분을 그렸을 것이라는 인상이 들었던 작품입니다.
대기의 흐름이 파도처럼 거세게 요동치고, 파도와 구름이 구분되지 않게 폭풍우가 내리치는 밤의 분위기가 인간사를 압도하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존 컨스터블,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
윌리엄 터너와 더불어 영국이 자랑하는 화가인 존 컨스터블의 목가적인 풍경화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평화롭고 한가로운 풍경을 보다 보면 여러 작품들을 둘러보며 생긴 피로감이 조금은 씻겨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폴 고갱의 작품(좌)과 마네의 작품(우)
반 고흐의 작품(좌)과 르누아르의 작품(우)
마지막 전시실에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모여 있습니다. 작품 수가 많지는 않지만 고흐, 고갱, 르누아르 등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많은 인파들과 잦은 카메라 촬영음 등으로 인해 한가롭고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시대부터 인상주의 시대까지를 아우르는 거장들의 작품을 한 곳에 볼 수 있다는 점, 어수선할 수 있는 구성을 시대별 설명과 함께 깔끔한 흐름으로 기획한 점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만났던 작품들을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자체로 반가웠습니다.
토요일 야간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주위가 깜깜해져 있습니다.
밤에 박물관을 나서다가 잠시 돌아본 전경은 웅장하면서도 기품 있는 모습입니다.
가운데 'ㅁ'자로 뻥 뚫린 공간으로 서울의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마치 건물이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하나의 작품처럼 전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건물이 남산타워를 품고 있는 전경은,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중앙박물관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 나라를 상징하는 문화 공간으로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처럼 잘 다듬어지고 멋지게 관리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