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haun SHK
Dec 31. 2023
케빈의 롤러스케이트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연다는 것
연말에 이리저리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나 홀로 집에 2>를 봤습니다.
뉴욕에 홀로 떨어진 케빈이 센트럴파크에서 노숙하는 비둘기 아주머니를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나한테 정말 멋진 롤러스케이트가 있었어요. 그런데 난 그게 망가지는 게 너무 싫어서 상자 속에 꼭꼭 보관해 두었어요.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발이 커져서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되었어요. 방 안에서만 몇 번 신어보고 바깥에서는 한 번도 신어보지 못했어요."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을 쓰지 않으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어요?
마음을 꼭꼭 닫아둔다면 내 롤러스케이트처럼 될 거예요.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번 해보세요. 잃을 것 없잖아요."
세상에 나서지 못하고 움츠러들어있는 비둘기 아주머니에게 케빈이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런 대사도 있었어?'
가벼운 오락영화로만 생각했는데, 괜스레 케빈의 말을 곱씹어 보게 됩니다.
감정을 다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꼭꼭 닫아둔다면 케빈의 롤러스케이트처럼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거라는 말.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온 20살 때가 생각났습니다. 학창 시절 온실 속의 화초처럼 학교 다니고 공부하는 것만 할 줄 알았던 나는 홀로 서울생활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끼니를 해결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거야 금방 익숙해지지만 꽤나 내향적이었던 성격 탓에 마음을 열고 새로운 친구들과 교류하는 게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도 그때는 케빈의 롤러스케이트처럼 소중한 것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마음을 꼭꼭 아껴놓았습니다. 혹시나 다치거나 상할까봐 상자 안에 보관해 둔 롤러스케이트처럼 세상에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고 힘들었습니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체 그게 왜 힘드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엔 무척 힘들고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세계로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를 깨뜨려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 차츰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정을 아끼고 마음을 닫아두면, 그 지켜진 마음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껴두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내가 마음을 닫아둔다면 내가 기뻐하든, 슬퍼하든 나의 마음을 살펴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란 점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조금씩 변화할 힘이 생겨났습니다.
마음을 열고, 감정을 나누고,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을 차츰차츰 해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명 두 명 친구를 만들어가고 친밀한 사람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낯선 도시에서 나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툰 서울생활은 덜 외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 홀로 집에를 보다가 서울에 첫 발을 내디뎠던 그 시절을 잠시 떠올렸습니다.
소중한 마음을 잘 지키는 쪽이든, 마음을 열고 이리저리 부딪혀보는 쪽이든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쉽게 얘기할 일은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야 나의 마음을 챙겨주는 사람도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의 감정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길 원하다면 내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감정을 나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야만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20살에 처음 서울에 올라와 그때 겪었던 그 시절의 내 마음과 영화 속 케빈의 대사가 맞닿아있어 영화가 새로웠습니다.
늘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만 보던 영화였는데 이번 연말에는 그 시절 내향적이었던 소년이 마음을 열어가던 모습이 떠올라 반가웠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이 본 영화지만 언젠가 다시 보게 되다면 또 다른 반가움을 안고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