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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aun SHK Jan 11. 2019

<칠드런 오브 맨>- 희망있는 미래

줄거리

영화는 2027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인류는 어떤 이유에선지 더 이상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지속가능성이 없는 세상이 되면서 인류는 혼란에 빠져듭니다. 폭동과 테러가 만연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가지지 못합니다. 정부가 무너지고 세상은 통제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정부와 군대가 버티고 있는 영국에는 이민금지법이 시행되어 통행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됩니다. 불법체류자들은 폐허와 다름없는 열악한 공간에 격리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테오는 아들을 잃고 난 후 삶에 대한 의지가 사라졌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의미없이 삶을 소모하는 듯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 부인 줄리엔으로부터 한 명의 흑인 여인을 이송시킬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허가가 없이는 함부로 이동이나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행증 발급이 가능한 테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죠.

놀랍게도 줄리엔이 데려온 흑인 여인 ‘키’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것이죠.

과연 테오는 키를 안전하게 목적지로 데려다 줄 수 있을까요? 뱃속의 아기는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을까요?



미래없는 사회

영화는 미래가 없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인류는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다음 세상의 바통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으니 미래를 그려볼 수 없습니다. 정부는 무너졌고 그저 조금씩 사멸되어 가는 인류의 모습만 남아 있습니다. 밝은 미래를 자양분으로 성장하는 희망이라는 단어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목표를 세우지 않고, 그 누구도 건설적인 일들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회는 점점 황폐화되어 갑니다.


만족지연

인간이 일시적 쾌락에 빠지지 않고 건설적인 행위들을 하는 이유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과 그 인과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에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현재의 짧은 기쁨은 미래의 기나긴 시련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반면 현재의 쾌락을 참고 미래를 위한 발전적인 행위들을 한다면 장래에 편안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니다. 인간이 대체로 베짱이보다 개미가 되었던 이유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더 큰 보상을 위해 현재의 쾌락을 유보하는 것을 만족지연이라고 부릅니다. 이 행위는 다른 동물들과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인간 행동패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쾌락을 참고 미루면서 고통이 있는 일들을 견뎌냅니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순간에 그 보상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하고, 직장인들이 업무스트레스를 참아가며 월급을 저축하는 이유는 보다 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당장 힘든 공부를 그만두고 직장을 그만두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더 가혹한 미래가 올 것을 예상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만족지연을 통해 현재의 시련을 인내하고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일들을 합니다. 희망을 보면서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죠. 반면 동물들이 발전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인내하고 노력을 쏟는 경우 드뭅니다. 인간의 전략적이고 특색있는 사고방식 사회를 빠른 속도로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 처럼 미래가 없는 사회에서는 어떨까요. 보상받을 미래가 없으니 현재의 쾌락을 참고 건설적인 일들을 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현재-미래의 인과관계는 끊기고 더 이상의 만족지연도 없습니다. 만족지연이 일어나지 않는 곳엔 일시적인 쾌락의 추구만이 성행하고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행동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희망과 미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은 인간에게는 대단히 가혹한 일입니다. 희망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고 인류를 역동적으로 발전시켜 온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미래가 없는 세계는 영화에서 그려진만큼, 혹은 그 보다 더 심한 디스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최근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있다는 말들을 합니다. 더 이상 만족지연을 하지 않고 현재의 기쁨과 현재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부모세대와는 다르게 이러한 경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미래의 모습이 불투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의 순간에 만족지연을 하며 고군분투하더라도 미래에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보상이 없는 미래는 희망이 없는 현재입니다. 사회가 역동성있게 발전해나가려면 젊은 세대에게 보다 많은 희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래사회는 미래세대들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색깔이 입혀집니다.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도 어두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이상적인 미래를 가질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건설적인 미래를 그리고 희망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걸어온 길엔 만족보다 후회가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앞에 희망의 빛이 있다면 우리는 의연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미래를 꿈꾸길 포기한다면 그보다 더 어둡고 무거운 사회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밝은 희망의 빛들이 더 많이 보이는 세상이 되길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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