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루이스 뱅크스는 강의 도중 TV속보를 보게 됩니다. 12개의 외계 비행 물체(쉘)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 상공에 등장했다는 긴급뉴스입니다.
웨버 대령(포레스트 휘태커)은 언어학 전문가 루이스 뱅크스 박사(에이미 아담스)와 과학자 이안 도넬리(제레미 레너)를 통해 외계 생명체와 접촉하기 시작합니다.
루이스와 이안은 군 관계자들과 함께 비행 물체 안으로 진입합니다. 그곳은 중력이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기묘한 공간입니다. 쉘 내부에서 그들은 외계 생명체와 마주합니다. (7개의 다리 모양을 가지고 있어 ‘헵타포드’라고 불림)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으로 외계 생명체와 소통하려고 합니다.
단어를 적어서 보여준 후, 손짓과 몸짓으로 그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외계인들도 그들의 언어를 루이스와 이안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며 헵타포드의 언어를 조금씩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헵타포드가 제시한 말에서 “무기를 제공하다” (offer weapon) 으로 해석되는 단어가 나오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중국은 전투태세를 갖춰 외계 비행물체를 공격할 준비를 마치고 다른 나라들의 동조를 요구합니다. 이들의 의도는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일까요? 이 상황은 평화롭게 풀릴 수 있을까요?
음악
영화는 시청각의 자극을 통해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단입니다. 대개는 시각적 요소가 매우 큰 영향을 차지하지만 (영화를 보고 우리가 기억하는 건 보통 그 영화의 이미지 또는 특정한 장면들일 것입니다.) 어떤 영화는 감상 후 음악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게 됩니다.
영화 컨택트(Arrival)도 이 작품을 떠올릴 때마다 Max Richter의 On the nature of daylight 음악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현악기 소리가 낮고 차분하게 깔리면, 우울하고 구슬픈 음악이 우리를 빠른 속도로 내면으로 침잠하게 해줍니다.
이 음악이 나올 때마다 외계생명체의 등장이라는 소란스런 외부세계는 사라지고, 루이스의 정적인 내면세계만 나타납니다. 주인공의 정적인 내면은 혼란스런 현재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아닌, 정지되어 있는 과거를 연결시켜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곳엔 사랑하는 딸아이와의 소중한 기억들과 가슴 아픈 이별이 새겨져 있습니다. 더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순간들과 자식을 앞세워야 하는 슬픔과 한스러움까지, 배경엔 모두 이 구슬픈 음악이 나지막하게 깔립니다.
딸아이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등장하는 행복했던 회상씬들은 역설적으로 그 슬픔을 더 크게 만듭니다. 루이스의 비애는 현악기 선율에 따라 관객들에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On the nature of daylight는 루이스의 슬픔과 아련함에 보다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만듭니다.
내면과 일상
영화는 외계인과의 조우, 미지의 존재와의 소통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관객들의 내면 깊숙이 다가와 감정을 흔들어 놓습니다. 가장 외부적이고 초현실적인 소재를 가지고서, 가장 내부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외계인과의 조우를 다루는 영화라면 더 거창한 주제의식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인류 전체의 희망과 미래, 전세계 공동체의 단결과 지도자의 리더십같은 주제 등이죠. 하지만 영화는 거창한 주제의식보다는 한 개인의 세밀한 심리묘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가슴 한켠에 추억과 상실감을 함께 가지고 있는 루이스의 내면입니다.
한편 영화 중간에는 외계인 출현으로 비상근무 중인 군인이 가족과 통화하는 모습이 잠시 나옵니다.
가족과 함께 있고 싶지만 임무 때문에 기약 없이 떨어져 있는 심정이 한숨 섞인 목소리에 묻어 나옵니다.
거창한 대의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나의 아내 혹은 남편이 어떤 저녁 밥상을 차렸을지, 그리고 딸아이는 학교 숙제들을 잘하고 양치를 잘하고 다니는가 일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는 것은 자의에 의한다면 스릴이지만, 타의에 의한다면 고통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외계인이라는 외부적 존재를 통해 한 개인의 내면과 자식에 대한 사랑, 소중한 일상 등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들을 더욱 극적으로 상기시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인상깊은 음악과 시각적 효과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외계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소재입니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활자를 매개로 외계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고 조금씩 성과를 보입니다.
그들의 언어를 분석하고 왜 여기에 왔는지 해석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관객들은 현장의 일원이 된 듯 얼른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집니다. 대체 그들은 왜 방문한 것이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중반부를 넘어서면 영화는 외계인들이 말한 “Offer Weapon”이라는 단어 해석에 의해 긴박한 상황으로 줄달음칩니다. 무기를 제공하라는 요청일까요, 아니면 무기를 이용해 공격하겠다는 선전포고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무기를 주겠다는 것일까요?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지도자가 출현하고 이에 동조하는 국가들이 나타나면서 전지구적인 연대는 끊어지는 듯 보입니다.
혼란의 상황에서 헵타포드(외계인)가 루이스를 부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Offer Weapon"의 의미를 알려주죠. 헵타포드는 루이스에게 무기를 주겠다고 합니다. 바로 미래를 보는 능력이죠.
3천년 뒤에 인류가 자기들을 도와줄 때가 올텐데, 이를 위해 자기들이 먼저 무기를 주어 돕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합니다. 마치 꿈 같은 만남의 순간이 지나고 루이스에게는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떠오릅니다.
미래의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 장면들은 더 이상 환상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해집니다. 루이스는 미래의 모습과 장면들을 미리 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루이스는 결국 그 능력으로 공격태세를 갖추던 중국의 사령관과 통화하여 그를 설득시키게 됩니다.
외계인이 준 미래를 보는 능력을 인류의 분열을 막고 외계인과의 평화를 지켜내는 데 성공하죠.
Flash back이 아닌 Flash forward
외계인이 준 능력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사실 영화 내내 등장했던 딸아이와의 소중한 기억들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On the nature of daylight 음악과 함께 나왔던 장면은 Flash back이 아니라 Flash forward 였던 것이죠.
영화 시작과 함께 나왔던 루이스의 독백은 이 영화의 핵심을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We are so bound by time, by its order. “ 우리는 시간의 순서에 얽매여있습니다. 늘 시간의 순서대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누구도 이 정해진 틀을 벗어날 순 없죠. 하지만 헵타포드와 그들의 언어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 순차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순간에 미래의 모습과 과거의 순간을 함께 볼 수 있는 것이었죠.
루이스가 외계인으로부터 그 능력을 얻은 덕분에 미래의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임무를 함께 한 이안과 만나게 되면, 예쁜 딸아이를 낳게 되지만 그 딸아이는 병으로 일찍 죽게 되는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미래를 부정하지 않고 선택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게 됩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인간은 미래를 예견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궁금해하고,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불안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과거는 이미 박제화되어 있고, (물론 과거에 대한 해석은 매번 달라진다는 점에서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현재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과거에 대한 반추와 미래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혀 현재를 놓치는 경우가 더 많긴 합니다.)
만약 우리가 나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 처음과 끝을 모두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고민일 것입니다. 대부분은 미래의 모습을 알게 된다면 미래를 바꾸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쁜 일과 슬픈 일들을 동시에 보게 된다면 대개 나쁜 일들과 슬픈 일들을 크게 해석하고 회피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죽음을 본다면 그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좋은 일이나 기쁜 일은 다른 미래를 선택하더라도 다시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확실한 불행은 피하고 다른 행복을 누리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러한 선택은 의도했던 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확실한 불행을 피한다고 해서 또 다른 불행이 오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불행을 피하는 것이 새로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의외로 우리 중 일부는 주인공 루이스처럼 그 처음과 끝을 알면서 동일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처음과 끝을 모두 아는 영화를 다시 보는 이유는 그 내용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주는 감정이 너무나 강렬하고 인상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따뜻하고 강렬한 행복의 감정때문에, 불행섞인 우리의 미래를 알게 되더라도 영화 속 루이스처럼 똑같은 삶을 선택할지 모릅니다. 그 삶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경험들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죠.
미래를 보는 능력은 말그대로 공상과학적 상상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루이스의 길을 가게 될지, 아니면 그 반대의 길을 가게될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약간의 불행이 섞여있더라도 그것을 넘어서는 큰 행복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나요, 혹은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