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esthetics of representation.
물리적 색으로 구성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심상이라는 물감을 더해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나간다. 하지만 인간만이 심상이라는 물감을 더해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기계를 활용하여 측정하는 물리학적 수치도 기계가 스스로의 심상을 담아 세계를 그려나가는 것이고 이를 표준으로 삼고 있는 거다. 인간은 다 같더라도 다른 세상을 표상하는 것과 달리 같은 기계가 같은 수치를 제공하는 이유는 기계와 인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이야기처럼 인간은 목적이 정해진채 탄생하는 것이 아니지만 기계는 그 자체로 목적을 지닌 채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하루하루는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획일화되어선 안 되는 찬란한 빛을 자아내는 비일상이 되어준다. 또한 이러한 비일상의 예술적 추동, 즉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예술적 자아(예지체)의 욕구와 불안이 세계를 개진하고 은폐하는 과정 속에서의 영감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우리의 이성은 빛나고 있는 하나의 별이 아니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에게 닿아오는 유성우 같은 축복이자 영감이다. 유성우를 타 더 넓은 세계와 깊은 사고로 나아가야 한다. 스피노자는 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야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본질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는 비일상에서의 축복을, 이성적 층위에서의 불안을 칸트가 얘기했던 넓은 세계를 마주하는 숭고함으로 전환시켜 세계를 인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비일상적 하루들로 구성된 집단이나 사회의 모습은 그 구성원이 사회를 얼마나 넓고 아름답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바탕을 두고 변화한다. 또한 이러한 변화의 일관적인 패턴이나 특징적인 점들은 우리에게 다시 전체적인 색을 씌워놓는 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색이 좋을 수도 안 좋을 수도 있지만 피할 수는 없으며 이 또한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감상하는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우리의 일상이 색다르게 다가오도록 그리고 그 속의 예술성이 우리에게 달콤한 멜로디처럼 다가오도록 글을 기고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아름답고 나아갈 수 있으며 서로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같이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