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수단의 공존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가?

층위적 목적론에 대하여, 예술 목적학에 대한 선구 및 선고

by 김승석

모든 것이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글을 쓰는 목적 또한 그들의 철학적인 관점에 대해 보충하고 그들의 사상을 더욱 세밀하게 개진하고자 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보였듯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세부적인 수단들을 제시하고 이들에 대해 정통하는 절대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때의 절대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세부적인 과제들의 명확한 이름을 제시했다는 좁은 의미의 절대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나 과정에 대한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모든 철학자들은 자신만의 목적에 대한 수단을 제시하였다. 어떤 철학자도 이러한 점에서 목적론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부터 비롯되어 이 글은 우리는 우리만의 목적을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러한 목적이 종합적인 명제로 구성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수단시되는 것들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무를 닮아있다. 층위적 목적론 또한 이러한 나무를 닮아있으며 나무들의 모습을 높이에 따라 층층이 자른다고 했을 때 그들의 모습이 자라나는 것이 하나의 층위를 넘어 다른 층위에 걸쳐있음이 이에 대한 영감을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목적을 향한 과정 속에서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들은 돈과 같은 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을 제외하고 전부 그 자체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수단에서 역 비롯된 학문들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좋음을 제시하기 위함에 근거하여 다른 목적과의 화해를 촉진하는 윤리학과 법학이 속해있는 형이상학적 화해학인 반면 다른 한 쪽은 뿌리를 잊게 하고 수단의 단일 목적화를 지향하는 교만적인 만추(慢醜)학이다.

이 둘은 인위적인 만듦에 따랐지만 위의 화해는 화해의 기작이 하늘의 선에서 근거한다는 것, 즉 초월적 신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오로지 선함에 관계 맺으며 형이상학이라 불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화해학의 탄생은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의 선악과를 먹음이라는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인간이 선함을 추구하고 자신들의 동물적이고 사욕적인 부분을 제어하고자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탄생하였지만 신이 내린 선함의 단초와 이를 선함으로 안다는 것과 이를 추구하려는 자유의욕적인 마음의 존재가 이러한 탄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가 중심 내용이 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화해학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교만적인 만추학은 나무의 모습을 아예 파괴한다. 뿌리에서만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로 묶어버리며 자신을 제일 위에 둔다는 그 사실 자체가 굉장한 교만이다. 또한 그 탄생의 과정에서 사욕이 너무나 영향을 많이 주었으며 그 자체의 목적이 긍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목적을 잊게 만드는 고유 특징이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따라서 만추학은 깊은 사유 없이는 교만 그리고 사욕과 너무나 깊게 연결되어 있는 인위적인 학문이다.

인간의 삶은 다양한 층위적인 예술적 공간, 즉 목적짐을 지고 있는 공간들의 겹침에 놓여있으며 그 스스로도 이러한 예술적 공간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자의식적이고 그 자체로 목적을 지니고 있는 순수한 공간이다. 이때 목적짐을 지고 있는 공간들에 자의식적 공간의 겹침이 일어나며 자극과 충돌이 무조건적으로 발생하게 되고 이에 따라 그 자신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때 자극과 이에 따른 반응은 각각 두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자극은 수용자의 평가에 따라 달라지기에 수용자적 긍정과 수용자적 부정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목적 지어져야 할 필요성에 따라 부정의와 정의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이 존재함에 따라 우리는 긍정할 것을 긍정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정한 것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자극은 엄밀하지 못한다면 교만으로 빠질 수 있고 이때 목적의 수단으로의 전락, 목적질 필요 없는 것을 목적화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지만 엄밀하고 섬세하고 사유된 상태라면 목적을 검토하고 목적화하는 경향을 보이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자극은 수용자적 측면에서의 경험적 지식이기에 그 본질과 괴리되어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하는데, 수용자적 측면에서 바라본 자극의 긍정/부정은 그 공간의 본질과는 구분되어있다는 뜻이다. 본질적인 면에서 학문은 고정되어 있지만 이러한 본질이 은폐되어 있기에 주변을 향한 뻗어나감과 다시 그 중심점으로 반추 되어가는 과정이 반복되며 넓혀가는 방식을 활용한다. 그런 반면 생명체는 특히 이성적 면에서 그 극단에 위치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탐구가 먼저 이뤄진다는 점에서 좀 더 능동적인 모양을 띠고 있다. 이러한 수동적 모습과 능동적 모습에 따라 그 예술적 공간 자체의 독립성이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과 학문 모두 관계 맺음으로 살아가며 인간에게서 학문이 세계와의 예술적 지평의 열림으로 탄생한 것이기에 인간이 학문보다 좀 더 독립적으로 보이는 것뿐이며 인간의 삶이 예술이자 학문이라는 점에서 구분되기 힘들다.

반응의 두 가지 분류는 화해와 폭력이다. 이때 이 둘은 서로 대립되며 화해는 소극적 화해인 수용과 적극적 화해인 존중으로 구분되며 이는 각각 전자는 법, 후자는 윤리로 연결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 법과 윤리는 이상적인 상태로 모두 진리적 선함에 층위로 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때 존중과 이해는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해는 새로운 예술적 층위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화해는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사용되며 소극적 화해는 법에 관계하여 강제적 적용을 보이기도 한다. 폭력은 소극적 폭력인 배제와 적극적 폭력인 탄압으로 구분되는데 소극적 폭력에는 문화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 적극적 폭력에는 신체적 폭력으로 연결되며 이들은 다른 하나의 예술적 공간의 파괴를 일으키고 목적을 철저히 분해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화해는 긍정적이며 폭력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숙고하고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소극적 폭력을 더욱 지향하고파 진다. 하지만 이는 소극적 폭력의 필요성을 인정하면 안됨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폭력은 자신의 일관성을 위한 시도이며 그 깨짐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되는 참된 실존에서의 비실존으로의 도피이다. 폭력이 시도되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스스로의 오류를 은페시키며 이러한 다양한 이유에 따라 스스로의 예술적 공간의 정체가 최고에 올라와있다는 왜곡된 인식과 함께 구렁텅이에 자기 발로 빠져들게 한다.

앞에서 소개한 화해학은 이때의 화해에 대한 연결지음과 화해에 대한 예술적 소통을 통해 발생하게 된 학문이며 법학과 윤리학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추학은 폭력을 예술화한것일까? 폭력은 악이다. 따라서 불가능하다. 앞에서도 만추학을 부정하지 않았다. 만추학은 그 근본적인 목적을 생각하며 스스로 낮은 곳에서 거해야함을 알아야 된다고 얘기한 것이다. 인위에 필요한 인위에 대한 예술이기에 그 자체로 보면 화해학보다는 진리에 더욱 멀리 떨어져 있겠지만 예술은 자체로 진리적 영역에 속해 만추학을 개진하였기에 사회에 도움이 되고 좋게 사용되는 부분이 있게 만든다.

이때 화해학이 만추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닐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두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겠다. 하나는 인위의 상황에서 도출되는 학문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이하의 자연스러운 상황에서의 도출되는 학문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간략히 먼저 개괄하자면 화해학과 만추학의 구분은 전자에서만 명증적이고 후자에서는 그 예술적 공간의 구성원들과 그들에 따라 산출되는 반응에 관해 변화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인위의 대상을 구심점으로 삼는 학문의 본질은 그 대상의 성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자연의 대상, 형이하적 진리를 구심점으로 삼는 학문의 본질은 “진리를 밝혀냄”이라는 가치에서 비롯되며 그 성질은 세계를 규제하는 몰가치적 원칙의 추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의 몰가치적 원칙의 한계성과 이를 어떻게 가치 판단하여 추구하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따라, 결국 반응에 따라 사람 각각에게 있어 화해학적, 만추학적 성질을 띄는 것처럼 보여지고 화해학으로 되었을때만 오로지 그 가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추학은 그 추구하는 대상 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면 자연에서의 진리 탐색을 목적으로 하는 형이하학은 목적에서의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형이하학에서는 오로지 반응의 차이이기에 화해학적 성질은 반응의 화해와 만추학적 성질은 반응의 폭력으로 반드시 이어지고 결국 이 뜻은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형이하학에 대해서는 만추학과 화해학의 구분이 불가능하고 개개인들의 그 반응에 있어서 화해와 만추라는 이름이 각각 붙어진 이유와 각각의 성질을 따온 듯이 닮아, 형이하학을 연구하는 능동적 성원들의 개별적인 그들 자신 하나하나의 화해적 반응 혹은 폭력적 반응에 따라 그 구분이 되는 듯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들의 폭력은 앞서서 설명했듯 그들이 그들 자신이 최고점에 있도록 만들어 한계를 설정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 판단의 오류와 거짓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자기 의식의 왜곡된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자기 열등성 및 도태성을 크게 지니게 되기에 학문하는 사람으로의, 더 넓게는 풍요로운 인생을 향유할 수 있는 세계의 성원으로의, 인간다움의 상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고 이는 학문하면 안되는 자세이자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자세를 뜻하는 것이다. 인간의 진리 인식 한계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형이하적 표상에서의 원리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기술에 왜 사상이 들어가냐며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 있다. 이들은 간단한 뉴턴 역학에서부터 복잡한 양자역학까지 여러 부분이 근본은 같아도 과학이 분파 된지 오래되었고 검증적이고 명증적으로 세상을 파악해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답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들어 반박하려 하며 질문들을 던진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10이라는 상수에서 우리 우주가 발생하였으면 그것에 대한 의문을 왜 갖지 못하는가?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수학적으로 결론이 나는 이유에도 그 존재의 저하에 깔린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수학은 다른 수학적 명제를 통해 증명해낸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곳에 우주상수가 왜 들어가야 하는지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야 할 것이며 그 숫자가 왜 그것으로 결론지어지는지 종합되지 않는 뿌리적 근원이 존재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기술과 과학은 사상에 결부되어있으며 그 자체로 자연현상에 국한되는 사상일 뿐이다. 이는 이들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다시 화해와 폭력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화해와 폭력은 세상이 발전될수록 그 범위의 확장이 같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폭력은 아닐 수도 있지만 (폭력의 확장은 어둠의 확산하고도 비슷해서 그의 반대인 빛의 확산과 비슷한 화해의 확장이 시작되며 사라질 수도 있을테지만 화해가 도출해내는 “옳음”이 진리일 수도,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옳지 않음의 옳음화 일 수 있기에 이에 대한 반항으로 폭력의 확장이 화해의 확장과 같이 이뤄질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예시로는 마녀 사냥 등이 있다. 이는 뒤에서의 교만한 언어 폭력의 힘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넷 상에서 재생산이 이뤄지기도 한다.) 화해는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인지될 수 있는 문제가 늘어나고 인지될 수 있는 환경이 변화되기에 이에 따라 확장되는 현상을 무조건적으로 겪게 되고 그 예시로 동물권에 대한 인식 확산이 있다.

중요한 것은 옳음에 대한 인식이 정당한 옳음이더라도 옳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것이다. 또한 옳음이 옳지 않음의 정당화더라도 그들을 배제하는 것, 탄압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대화적, 예술적 화해학 공간에 초대함으로 지성적 논의와 옳음에 대한 설득이 필요한 것이지 이러한 의견을 묵살한 채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언제나 정당화 될 수 없다. 앞에서의 폭력의 확장은 이러한 화해학의 확장이 아니며 폭력은 언제나 부정적이고 옳지 못하다. 만약 잘못된 주장을 펼치는 쪽이 논리적이지 않고 교만한 언어폭력을 예술적 공간에서 시행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무시해야하는 것이지 배제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무시와 배제는 다른 개념으로 무시는 그 스스로 도태되는 자신이 실행한 폭력의 결과로 자기 스스로가 수반해야하는, 그 귀책 사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때의 무시는 굉장히 오랜 사유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가 배제를 무시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씌워 보고 있는지 자신 스스로 오랜 시간 질문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화해가 확장되는 현상에서 다른 중요한 점은 이러한 확장이 집적의 결과이지 사회의식이나 시민 의식의 성장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며 인류의 지능이 높아진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다는 점에서 우리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 그 전의 탈레스나 공자의 사상의 명료성있는 부분들과 존경받아 마땅한 부분들을 존경해야 하며 그들이 틀렸더라도 그들의 논증의 명료성이 얼마나 우리에게 다가오는지에 따라 그 부분들에도 존경을 보내야 한다. 이것이 왜 칸트가 선의지에 대해 논증하는 그의 저서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법칙은 존경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 말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존재하는가? 이 문제는 칸트와 헤겔 이후 니체와 실존주의자들에게 많은 논쟁을 일으켰으며 니체는 이성에 기반한 도덕이란 약자들이 강자를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이고 비겁한 노예도덕이라고 평가하였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획일화된 정답과 오답이 존재하지 않는 고대 그리스의 매력에 빠졌으며, 이에 따라 힘에의 의지에 따른 결투를 중시하였고 양육강식, 복수, 전쟁, 강탈에 대해 인간 그 스스로에 대한 주인의식을 지닌 자유로운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의로운 것이라고 보았다. 니체는 르네상스 시대에서의 이기적인 본성에 충실하여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상태가 주인 도덕이며 외부의 압박을 내재화하지 않고 잊거나 복수하는 상태가 주인 도덕의 상태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그는 노예 도덕을 비겁한 본성을 지녀 복수할 수 없음을 하나의 미덕으로 승격시켜 왜곡되고 위선된 모습으로 치장한 뒤 가슴 속에서는 증오와 울분을 삭히지 못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노예 도덕에서 강조하는 청빈, 겸손, 순결 등은 자유롭고 활력적인 자질을 쇠퇴시키고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또한 지배 집단에서 발생한 주인 도덕(자율성을 인정하는, 힘에의 의지로 대표되는), 피지배 집단에서 발생한 노예 도덕으로 도덕을 구별하였다. 그는 도덕적 현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고 설명하였다. 주인 도덕은 자신에 대한 확신과 긍정에서의 찬미적 도덕으로 스스로를 긍정하기만 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의 선한 측면이다. 칸트, 흄 등 그 이전의 윤리학자들이 얘기했듯 이성에 의하던, 경험에 의하던 마음에서 우러나와(동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에서 통용되었던 최대의 자율성을 인정하게 된다면 노예 도덕도 주인 도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또한 니체는 감정적 층위와 이성적 층위의 분리를 전혀 이루지 않고 있으며 그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의욕과 의지, 그리고 적극적 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승리 이후의 복수와 관련된 부분이 그 결과로의 과정 속에서의 순종적이고 겸손한 과정적 태도와 인과관계를 이루지 않는 상황이 생길 때도 이기적인 인간 본성과의 괴리는 드러난다. 또한 니체의 생애는 불우했다. 항상 병을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은 조숙했던 니체를 놀리기도 했다. 이러한 불우한 생애는 결국 그에게 피지배층이라는 인식과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자격지심이 노예 도덕의 상태로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복수하고 싶었지만 복수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기에 결국 그 화살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기에 주어진 상황(운명, 결과 등을 포함한)에 대한 절망이 과정에서의 도덕적 선함의 불필요성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니체는 또한 환경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이기적인 상태가 비도덕적이라고 평가하는 사회가 부정적이라는 태도만을 견지한다. 이러한 집착적 모습은 니체가 플라톤을 평가하며 현실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도피하여 이상세계로 피해버린 겁쟁이라고 말하였던 것이 결국 위버멘쉬와 주인 도덕을 지향하는 세계로 도피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니체의 사상은 니체가 동경하던 현실 세계에 대한 인정이 아닌 그가 비판한 플라톤식 이상주의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선함과 악함의 경계를 부셨다는 평가를 받아오고 어려운 비유를 통한 설명들로 유명세를 얻은 니체는 사실 자신의 어릴적 트라우마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예술적 성장이 멈춘 상태에서의 비의도적인 복수적 태도로 그의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논지로 돌아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어떻게 구별해야 되는가? 선함과 악함은 타자가 존재에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자는 선함과 악함이 반응의 층위에서, 즉 감정의 층위로 존재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면 존재는 그 행위에서 동기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이성적 층위에서 선함과 악함을 평가한다. 존재 자체는 스스로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있으며, 악함을 선함으로 오인하는 무지한 상태에 존재한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측면에서 드디어 타자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걸 다 알 수 없기에 결국 선함과 악함의 인지적 확장과 주체성있는 선악 구별에 있어 타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다는 점에서 선함과 악함은 타자가 존재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이때 선함과 악함을 얘기하는 것은 결국 반응과 이성의 결합으로 이성적 층위에서의 선함과 악함의 구별에 따른 반응과 감정적 반응의 전달로 존재에게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성찰이 부족한, 혹은 할 수 없는 존재는 이성적 층위로의 학습으로 가르쳐야 될 필요 또한 존재한다. 선함은 주체적인 판단 아래에서 이뤄지지만 주체적인 판단의 근본은 나와 타자 그리고 사람의 관계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사람의 선함, 악함을 타자가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악한 행위를 성찰 없이 행하는, 악한 행위를 의도적으로 행하는 사람에게 악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언어적, 성찰유도적 자유는 가지고 있다.

니체의 철학이 얘기하는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은 논리와 무논리에 관련해서만 쓰임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무논리들은 그들만의 도덕 체계로 논리성을 파괴하고 폭력을 저지른다. 무논리는 자신의 세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억지를 부리는 것이며 그 자체로 교만한 하나의 폭력행위이다.

선함은 우리에게 언제나 옳다는 표상으로서 전해온다. 그렇다는 점에서 선함의 표상이 옳음과 일부분 이상 일치된다면, 혹은 옳음의 지향이 선함에 있다면 자연적인 표상들이 사물 자체의 특성의 일부를 포함한다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논증하였던 물 자체가 표상으로 제시된다는 것은 순수 이성으로의 이성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줌으로 사물 그 자체의 본질, 칸트의 저서에서의 말로는 물 자체는 알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하지만 헤겔은 정신이 스스로 정신을 사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유할 수 있는 주체의 정신과 대상의 정신이 같으며 서로 합치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때부터 문제가 되어왔던 대상에 대한 표상과 대상의 합치를 논리적으로 증명해냈으며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인지 불가능성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헤겔은 그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이성의 변증법적인 인식과 물 자체에 대한 인식성에 대해 논하였다. 나는 이에 동감을 표하는 바이며 하지만 정신의 주체성과 합치되는 부분의 정신의 대상은 언제나 직접적인 것이 아니고 동일하지 않다. 정신현상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정신의 고행으로 밝혀진 이성의 주체자이자 대상인 정신 그 자체의 완전성과 정신 그 자체의 한계성이다. 정신은 그 스스로에 대한 인지로 대상과 주체의 합치를 이루기까지 헤겔은 절대정신으로의 길을 걷는다(성장으로 이른다.)라고 표현된 정반합적인 과정을 거치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포용되는 것들은 스스로의 모순성에 의해 파괴되어 합쳐지는 것이므로 정신이라는 주체와 그 대상은 외부에서 ‘나’로 옭아매며 간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고 파악될 수 있다. 즉, 이는 헤겔이 얘기한 물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인지 가능성과는 달리 표상을 통해 물 자체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과 이성 능력에 따라 발생하는 표상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를 확인했을 때 (대상들의 화두를 던지는 정도, 변증법적인 인지의 가능성이 어느정도인가에 대한 부분), 물 자체를 활용하여 다른 사물을 만들어내고 활용한다는 점에서(간접적 인지로 파악된 물 자체에 대한 공학적 활용) 등이 물 자체가 변증법적 존재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다시 정신의 구성 속에 존재하는 선함의 특성도 변증법적임을 알리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사용가능하지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특성은 앞에서 우리가 옳지 않음을 옳음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진리의 인식 한계성과도 연결된다.

다시 논의로 돌아와서 화해와 폭력은 오로지 수용자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예술적 공간과 다른 예술적 공간의 피상적인 충돌만을 일으킨다. 화해와 폭력은 그 둘의 공간 겹침의 일차적인 반응이며 실천적인 반응에 불과하다. 그들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함에도 이들이 한계를 지니고 선함과 악함의 실천적 영역에만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에는 이들을 초월하는 존재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우리 삶에서 행동 지침이라는 가장 선험적인 영역에 속하며 좋은 삶을 위한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얘기한 정신일 수도 있지만 정신은 그 스스로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기에 절대 정신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정신의 구성요소인 선함과 반응들 (화해와 폭력)을 뛰어넘는 어떠한 것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은 변증법적인 원리와 그에 따라 나타나는 인격성의 예술성(인격의 아름다움과 빛남,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예술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술적 공간의 진정한 충돌과 그에 따른 생명성은 예술로 발현되며 예술적 층위에 새로움은 공간을 개진하고 그곳에 둘 혹은 다수의 예술적 공간의 주체들이 참여하는 과정으로 밝혀진다. 이러한 예술적 공간의 탄생이 우리가 선함을 추구해야되는 원인이자 그 자체로 가장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방법이며 신이 이 세상을 계획하고 만들어낸 기초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예술적 공간은 능동적인 예술적 공간과 수동적인 예술적 공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사실 수동적 예술 공간과 능동 예술 공간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앞에서의 학문과 인간에 대한 부분에서 드러났듯 그들은 그들 자체로 예술적 공간을 지니고 있는 생동하는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각각 수동적, 능동적 예술 공간과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술적 공간은 변증법적이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하지만 확실하게 정해져있는 본성을 지닌 것들에 대한 탐구와 그 탐구 과정에서 성장하고 이러한 예술적 공간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교육에서이다. 그렇기에 나는 교육을 철학의 가장 큰 실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의 가장 큰 실용이라는 것의 뜻은 철학에서 비롯된 가장 큰 예술이라는 것이다. 진리에서 철학이 가장 먼저 생겼으며 철학에 있어 모든 것들이 포괄 될 수 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졌기 때문에 철학이라는 이름의 예술적 공간이 가장 처음으로 태동하였고 그 후 각각의 학문들이 그들의 사명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밝혀내어가며 생동성을 보여내는 것이다. 교육은 그런 학문들 중에 과정과 결과를 포함하고 삶을 포괄하는 생동적 흐름의 정수이기에 철학의 정수, 즉 예술의 정수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공간은 또한 이성적인 부분과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에서의 관점으로 돌아보고 이를 통해 예술 방법이 왜 세계의 창조적 원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할 것이다.

인간에게 본유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은 크게 두가지로 나눠질 수 있다. 바로 예술적 사랑과 욕구적 사랑이다. 예술적 사랑은 3가지의 내부적 사랑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창조적 사랑과 존경적 사랑, 마지막으로 정반합적 사랑이다. 욕구적 사랑도 두 가지로 나눠질 수 있는데 생물학적 사랑과 감정적 사랑이다. 예술적 사랑은 이성적 사랑이다.

정반합적 사랑은 하나의 예술적 공간(세계)와 다른 예술적 공간(세계)의 부딪힘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저항하는지의 관계를 다루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세계의 불안을 일으키면서도 서로의 완전성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이는 모든 예술적 사랑을 본질적으로 포함하는 과정으로 존경적 사랑은 정반합적인 사랑을 촉구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고 창조적 사랑은 정반합적인 사랑의 이후에 산물인 하나의 예술적 공간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이러한 사랑은 그 자체로 순환적인 과정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창조적 사랑은 본질적으로 존경적 사랑을 이끌어내지 않는다. 창조적 사랑을 통해 밝혀낸 혹은 창조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존경은 본질적으로 주어져 있음 혹은 그 세계 자체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감에 따른 새로운 자극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창조적 세계가 그 자체로 유동적이지 않다면 그에 대한 존경적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전자는 선험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한 필연적인 존경이며 후자는 세계를 묘사한 세계를 모방한 세계와 같은 원리로 진행되어 가는 창조된 자의 자아적 개진의 놀라움에서 비롯되는 시그모이드 함수적 존경이다.

따라서 정반합적 사랑은 우리가 얘기하는 피상적 사랑을 뛰어넘는다. 사랑은 사람들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산출해낸 모든 것에 대한, 그리고 자녀와 부모 간의 관계에서도 허용될 수 있는 이성적이고 본질적으로 감정에 대한 이성적 사유 측면에서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부모는 창조적 사랑과 존경적 사랑을 통해 자녀라는 세계를 산출하고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계가 아닌 자녀가 보는 세계 또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며 정반합적 사랑을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추구하게 된다.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도 서로에 대한 정반합적 사랑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내고 자녀라는 세계의 탄생을 목격한다. 또한 그 속에서 자녀는 끊임없이 스스로 생동한다. 부모와 자녀는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서로에 대한 정반합적인 사랑이 가능한 것이고 정반합적 사랑은 변증법적이다.

이 파트에서 어떠한 사람은 동물이나 그 외의 존재에 대해 그 삶을 체험해보지 못했으면서 그들이 왜 이성적인 주체자에 속하지 않음을 알 수 있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이에 대해 우리가 행동을 함으로 많은 생명체들의 터전에 대한 탐구와 변형 그리고 도구를 활용한 다른 생물에 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우리와 거의 괴리되어있거나 관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경우에 ( 여기서의 괴리는 우리가 미생물들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거시적인 과학기술의 활용은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실제 크기에 따라 그러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인데 그런 존재가 존재하려면 우주에 있거나 인간과는 많이 괴리되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정도일거다. 또한 만약 관찰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에 있어 그들이 우리보다 선험적인 존재들이라 쳐도 그들의 원인이 존재해야하기에 신에 대한 관점은 변화될 수 없으며 관찰만 하고 있는 존재의 존재 가능성이 명확하지 않고 그들에 대해 논의해봤자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가 유일한 변증법적 유한 존재임은 변하지 않는다. ) 우리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확인했을 때 다른 차원이 있지 않은 이상 인간이 가장 발전된 극단에, 생명 스펙트럼에서 가장 우위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변증법적으로 인간의 삶이 구성되어있다면 우리는 하이데거의 본질적인 불안으로 삶을 이해하며 이를 바탕으로 다른 동물들에 관해서 얘기해볼 수도 있을 것인데, 죽음과 삶의 경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탈은폐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탈은폐는 은폐를 하나의 속성으로 지니고 있을 때 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하기에 인간은 현존재적 존재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다른 존재자들은 그 지각 정도와 능력에 따라 스스로에 대한 존재를 자각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만큼의 탈은폐적 속성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다른 동물의 눈에서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의 행동이 그들에게 경험된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탈은폐적 속성도 우리에게 비춰져야 한다. 이때의 그들은 앞의 괄호에서 다뤘듯 그들을 인식하는데에서의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존재로 가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우리와 그들이 하나의 감각 세계에 존재하며 그것이 간접적이더라도 객체로 인지할 수 있다는 점과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된다는 것이 과학적인 특성으로 현상 세계에서의 사실로 드러났기에 이러한 시야에서 우리에게 탈은폐적 속성이 드러나야 하지만 그러한 부분은 생존이나 생식에 국한되어있는 것처럼 지각되고, 동식물 그 외의 것들이 우리의 생존에 도움을 주고 그들 스스로가 인간만큼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인간이 생명 스펙트럼의 극단에서 가장 높은 이성적 존재로 유한 존재 중에서 군림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는 점에서 나는 생명의 존엄성은 모든 생명에게 존재하고 예술적 공간을 열어주는 모든 것들에게 가치가 존재한다고 보지만 모든 것의 우위에 인간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가치를 활용하고 가치를 가치있게 인지하고 가치로 만드는 것이 인간이다.

이 부분은 논외적인 이야기이지만 만약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서도 그들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공간에서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공간에서의 활동 또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서로 인지하지 못하고 우리 세계에서의 그들의 행동과 삶 양식에 의거할 때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예술적 역량을 갖추고 있고 삶의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그렇다는 점에서 인간이 우리 세계에서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다.

예술적 공간에서는 누구든 그 화두를 던지며 그에 대한 반응을 하게 되는데 자연물과 같은 물자체는 화두만을 던지며 학문과 같은 인위적 예술물은 자연물 혹은 인위적 예술물에게서 던져진 화두에 답한다는 점에서 작용이 있다. 자아는 또 다른 자아를 만날 때 화두를 던지며 그에 대한 반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유한 존재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인간만이 이성적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으로만 구성되어있지 않다. 현상계적이고 생물학적인 목적에 따른 생태학적 사랑과 감성적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랑은 특히 감성적 사랑은 생리학적인 본성에 따라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 기여한다. 다시 말해 감성적 사랑은 변증법적 사랑을 깊이 있게 실천하도록 하며 사랑의 지속과 사랑의 성장 및 심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불완전하고 현상계의 안좋은 부분 또한 가지고 있기에 반응의 단계에서는 아직 비본래적인 실존으로의,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의 도피성이 관찰된다. 반응 중 화해는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진리 불일치성을 인정해달라는 자기 세계의 보존성과 일관성 유지에 관련되며 이러한 사고가 자기도피적 성격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반응 중 폭력은 그 자체로 스스로가 진리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본래적 실존으로의 도피성이 관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층위에서의 공간, 인간의 삶이자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그 생동적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이는 우리가 영감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와 관련될 수 밖에 없다. 영감은 유일한 예술적 공간으로의 지향이며 예술적 층위로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는 헤르만 헤세의 책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라고 말함과도 관련되어있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하지만 그 신은 틀렸다.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의 구분 없는 하나의 활동과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아브락사스는 영감과도 같으며 본질적 진리로 향하는 수단으로 새들을 추동시키며 날아가게끔 하는 존재일 뿐이지 신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까워져야할 대상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의 목적이자 초월적 존재인 신, 그 자체로 진리이다. 여기서 나는 모든 것에 내재하고 있는 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사유 체계 속 진리와 궁휼의 짜임새 속에서 탄생한 존재들로써 그 창조자이자 초월적 창조주, 가장 예술적인 존재 그 자체의 인격신에 대한 것이다. 궁휼 또한 진리이다. 신에 대한 논의는 또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신은 세상의 탈은폐적 추동을 부여하며 최초원동자이자 모든 개념의 시작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은 그저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아닌 형이하의 창조주로 형이하적인 탈은폐적 속성의 탄생을 직접 빚어내었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지각되고 인간의 지각 과정의 존재와 타 존재자들, 사물들의 존재 자체가 신의 존재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데미안에서 얘기하는 듯한 선과 악의 비구별은 옳음과 옳지 않음의 비구별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맞으며 그 자체로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옳음과 옳지 않음이 불분명해지는 공간의 태동이 예술을 통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확실히 옳은 것, 즉 선한 것, 결국 진리와 연관된 것을 지키는 것에 대한 당위, 즉 인간은 선함에 따라 행위해야할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옳음과 옳지 않음이 불분명해지는 공간의 목적은 그 본질적 진리에 있기 때문이다. 진리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분명히 포함되어있다.

그럼 다시 영감으로 돌아와서 영감에 대해 설명해보자. 아까 앞에서 예술적 공간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아감으로 발생한다는 것과 옳음과 옳지 않음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 예술적 공간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는 점에서 영감은 그 자체로 본질로 향하는 추동으로 하나의 세계를 파괴함으로 더 넓은 세계를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예술적 공간은 주체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배타적이며 불가침적인 공간을 형성해낸다. 결국 영감은 우리에게 실존적 불안인 죽음과 마주치게 하는 것이다. 이때의 죽음은 후에 말할 생물학적인 죽음과는 다르다. 생물학적 삶의 상실은 두렵지만 이성적 존재의 상실(예술적 생동의 상실)은 그와 비슷한 혹은 더한 불안을 선고한다. 따라서 영감은 스스로의 세계를 깨고 실존적 불안, 즉 죽음에 가까워지게 한다.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해 모리스 블랑쇼는 비실존적 주체라고 정의내리며 이에 대한 가까워짐이, 타자화됨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제시했으며 이 상태에서의 개인화되지 않은 화두의 영감적 다가옴이 비실존적 주체인 ‘그’, 즉 죽음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던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감은 선험적인 작용으로 진리 존재적 자각에는 후행하지만 이를 인식하는데에는 선행한다. 영감은 예술적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예술적 층위의 창출과 관련되며 존재적 자각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발생하며 이에 대한 인지는 영감을 경험하고 인지했다는 사실이 다시 인식의 바다에서 재고양됨으로 인지하게 된다. 이때의 인식은 과거의 인식과 같은 내용이더라도 층위적 차이가 존재하며 이를 결정화시키며 성장시켜나가야됨을 본능적 충동으로 그 자체적 쾌락으로 우리에게 드러낸다. 영감은 경외감이며 화해와 폭력을 깨부수는 이를 초월하는 감각이다.

그렇기에 영감에게 쫒기는 삶을 살아야된다는 충동이 있으며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당위성이 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영감은 노자의 ‘도’와 같아서 인식의 바다에서 재 고양된 이후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영감은 ‘영감’이라는 단어를 초월하며 자각과 융합 그리고 합치적 진리의 간접적 자각, 더 넓은 예술적 빛의 관찰에서 비롯된다. 뉴턴은 태양을 너무나 오래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찰하여 눈을 잃을뻔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영감은 너무나 강렬한 진리의 빛, 마치 뭉크의 태양과 같은 빛에 나도 모르게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자, 이전의 삶에 대한 파괴 그리고 파괴된 세계의 파편화되어진 수용에서의 새로운 연쇄반응이다. 이 느낌에 대한 설명을 더 추가하자면 뉴턴의 고전역학 발명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발명이라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나눠질 수 있다. 뉴턴이 말했듯 거인의 어깨에서 바라보며 더 넓은 빛을 바라보게 된 세계의 확장과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도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두가지의 측면은 사실 한가지인데, 결국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공존 그리고 서로의 보완적인 형태는 이 또한 급진적인 예술의 확장이었음을 알려준다. 어떤 것도 옛날의 빛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확장되고 조금씩 이동하는 것일 뿐이다. 옛 페러다임이 있기에 새 페러다임이 있는 것이고 옛 페러다임은 완전히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는 이론에 대한 첫 번째 관문으로, 그 이전에 그들의 본질에 대한 의심으로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스스로 고개를 숙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감은 그렇다는 점에서 화해와 폭력의 어머니이며, 화해와 폭력의 반응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반응을 일으키는 존재까지 만들어낸다.

앞에서 영감은 죽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괴는 본질적으로 죽음이다. 이 죽음과 생물학적인 죽음에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삶의 개념은, 존재라는 개념은 죽음을 내포하며 생물학적인 죽음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죽음 이후에는 생명의 생동성이 사라지며 스스로 언제나 주체자의 역할을 해왔던 정신이 성장할 수 없는, 생장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서는 생물학적인 죽음 앞에서의 살아있고 싶어하는, 이성적 죽음의 회피를 원하는 우리에게 특별한 사유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

유서는 남길 유, 글 서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이다. 유서는 그런 의미에서 일기이자 남긴 글이다. 유서는 죽기 전에 남기는 글이라고 해석되어왔지만 유서는 죽기 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삶의 충돌에서 점차 파편화되어보이는 일생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스스로의 삶의 추동이 여기까지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반대되는 속성의 결합으로 죽기 전에 쓰여진 유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정의내리고자 하는 인간의 의식과 같다. 그런 관점에서 인간의 의식은 죽음을 지향하지만 죽음과 반대되는 삶을 지속하고 싶어한다. 자의식적인 존재의 일관성과 삶의 추동이 여기까지임을 나타내는 것은 여기서 각각 삶에 대한 내용과 죽음 이후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듯 보여도 인간 의식의 죽음 지향성을 대표하는 두 측면이다. 이때의 죽음은 불안에서 비롯되는 파괴적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생존 지향성을 대표하는 두 측면이다. 일관성에 대한 간곡한 부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서를 통해 스스로의 일관성에 대한 재정의를 내리는 것은 그들의 한계를 그들이 안다는 점에서 그들의 세계가 본질적으로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이는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기에 헤겔은 이러한 사람의 속성이 변증법적으로 구현되어있으며 이러한 인간을 즉자대자적 실존 주체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유서는 인간의 죽음과 삶이 가장 중첩되어있는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삶에 대한 추동과 그 미래를 지향하며 과거를 돌아본다는 점에서 일기와도 같고 유서는 생물학적 종말을 앞에 둔 가장 일상적인 행위인 일기를 쓴다는 것이 가장 비일상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리스 블랑쇼는 일기에 대해 나 자신을 지우면서도 고유함이 존재하는 본질적인 비실존적 주체로의 다가감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런 과정의 논증을 통해 우리는 유서가 글의 일부이며 그중 일기에 속하고 일기들 중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모든 글은 그 자체로 생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유서는 끝과 그 후에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형식을 제한받는다는 것이 이러한 특별한 위상을 드러낸다. 또한 유서는 그 자체로 죽음 직전에 쓰인다는 점에서 다른 일기와는 달리 그 이후 탈은폐적 존재의 생물학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그렇다는 점에서 유서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일관성을 위해 마지막으로 적는 일기가 될 것이며 겸허히 자신의 세계를 결말짓는, 선포하는, 혹은 아쉬움을 담은 것이 될 것이다. 전자의 두 속성은 자신의 일관성을 확고하게 주장하지만 후자의 것은 이제까지의 것들의 일관성을 확고히 하며 그 속에 있는 발아해야 될 씨앗을 개진시켜달라는 탈은폐적 속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 속성들은 모두 자신의 것을 바탕으로 그 미래를 개진하라는 명령이 내포되어있기에 그 자체로 스스로의 사상적 종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사상적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과 비실존으로의 도피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유형의 유서가 존재하지만 정확하게 한 유형을 보이지는 않으며 그 자체로 많은 부분의 개진 없이 후자와 전자 중 처음을 적절히 결합시키는 경향을 보이는 유서가 많다. 하지만 그렇더라고 해도 이 전자와 후자의 유서가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역사학이 아닌 이상 모든 이들에 대한 시선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내지 않는 진리를 위한 학문들 특히 철학에 있어서는 이들의 이와 같은 생동성이 일관성을 유지하지는 않되 그들에게 있어 진리적 면들의 모습 혹은 존 스튜어트 밀이 얘기한 것과 같이 틀리지만 반박될만한 것들에 대한 것으로 엮어지며 우리에게 예술의 장, 담론의 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타인들에게는 유서가 사상적 생동으로의 탈은폐의 종말을 허락하지 않게 만든다. 즉, 유서는 사상적 생동에 있어서 결말지음으로의 방향성 혹은 개진해야 될 것들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결국 이는 유서를 쓴다는 것 자체가 비실존으로의 도피가 될 수 없으며 실존으로의 당당한 개진을 마지막까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있어 그들이 적은 유서와 일기들은 생물학적 탈은폐가 종말된 후 그들을 일관성 없는 존재로 만든다. 그들의 삶이 바라던 일관성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를 활용하여 깊이 없는 사유 측면에서는 (그들의 삶이 그의 사유와 너무나 깊이있게 연결되어있는 사유 측면) 그들의 사유가 얼마나 깊이 없었는지 알 수 있기도 하며 그럼에도 깊이있을만한 씨앗을 얼마나 함유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으며 깊이 있는 사유 측면에서는 그들의 사유가 얼마나 그 자체로 탈은폐적 추동을 거쳐 나왔는지 알 수 있고 깊이 없음에서 깊이 있음으로 나아가는 과정도 면밀히 분석 가능하다.

또한 유서는 그들이 쓰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붙는 학문적 성장이 그들의 유서이자. 그들의 삶을 다시 살아나게끔한다. 이러한 점이 드러난 예시로는 최재천 교수님의 제인 구달 교수님의 죽음 이후 반응이다. 유서는 생물학적인 종말 이후에 빛을 발한다는 점에서 인격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고양시키게끔 한다. 하지만 유서라는 것은 슬픔의 색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빛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세계를 개진시켜주는 본질적인 불안을 내포한 빛 말이다.

유서는 이런 점에서 삶이라는 이름의 예술에서 맨 앞 페이지에 서술되어야 한다. 유서는 “누구에게 감사하며 누구에게 이 책을 바침”과 같은 것이며 유서는 그의 생애를 개괄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태도와 정치체에 대한 논의만을 남기고 있다. 이 부분은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배운 부분이 적기 때문에 조금은 만족스럽지 못한 내용과 사유가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럼 시작해보자.

칸트는 인간에게 있는 인격성에 따라 인간을 오로지 단순 수단으로만 사용해서는 안되며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는 이를 확장시켜 모든 것들에 대한 수단적 활용에 있어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이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렇다는 점에서 우리는 단순 수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온전히 목적처럼, 최선을 다해서 대우해야 함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그들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예술적 공간에 자신이 속해있던지 그 공간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그 공간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본질과 목적을 왜곡해 바라보며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결코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며 오로지 수단으로만 그 공간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공간의 목적을 왜곡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과 폭력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무지한 상태에서의 알지 않으려는 자세는 하나의 폭력과 다름없기에 사실상 구분될 수 없다. 또한 타인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스스로 성찰하지 않았다는 것이기에 그것도 하나의 폭력과 다름없는 것이다. 결국 이는 영감이 어떠한 본질에 대한 이해나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며 화해적 반응이 폭력적 반응보다는 영감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에 있어서 더욱 이득이 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화해적 태도를 가지고 산다고 해서 영감적 삶을 산다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은 다른 것임을 앞에서도 명확히 밝혔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는 그 예술적 공간에 몸담고 있어 그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과정에서의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질과 목적을 왜곡해 바라볼 때 최선을 다할 수 없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다는 점에서 최선이라는 정의는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최선은 단순히 열심히하는 것에 그치면 안되는 것이다. 최선이라는 것은 옳음과 옳지 않음에 관게하지 않고 그 목적에 알맞은, 그 목적에서 산출될 수 있는 결론들을 지향하며 목적에서 오는 선험적 영감을 바탕으로 삼아 나아가는 태도라고 정의내려야 한다. 이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이 삶의 태도에서의 중점이 되더라도 악한 행위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위에서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악한 행위는 폭력을 상징할 것이다. 폭력은 무지의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무지의 상태와 같은 것은 아니다. 폭력은 앎의 상태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와 세계의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충돌의 가능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에 어떠한 예술적 공간의 층위를 완전하게 알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완전한 앎은 없지만 이를 무지한 상태로 정의내릴 수는 없다. 무지한 상태는 이보다 더 무지한 상태로 스펙트럼의 가장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면 완전한 앎이 스펙트럼의 가장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봐야한다. 인간은 이 완전한 앎의 상태에 아무리 도달할 수 없다고 해도 오른쪽으로 가고자 하는 지향과 이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닌다. 이는 인간이 가진 목적과는 다르다. 인간은 이를 추구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이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에 귀속되어있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욕구적인 측면으로 해석한 마키아벨리나 니체의 경우에는 힘에의 의지와 같은 감성적 측면에서의 우월성을 욕구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정의내렸지만 이러한 특징은 이성에서의 반짝임을 담은 현상계와 예지계를 종합하는 아름다운 지향성으로의 이성적 측면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무지함 자체는 폭력이 될 수 없다. 폭력은 무지함에서 비롯될 수 있는 태도를, 즉 반응의 측면에서의 악함이기 때문이다. 무지함은 악한 상태나 폭력은 아니며, 접하지 않아 인지되지 못한것에 대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상태이다. 하지만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당연함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후자는 폭력으로 가기 쉬운 상태이며 폭력적인 반응을 정당화시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무지한 상태에서도 언제나 폭력적이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이들은 목적을 바르게 인식하였음에도 표층적인 목적 달성의 측면에만 집중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은 이는 오로지 실천적인 면에서만 가장 겉의 부분에서만 옳은 것으로 표상되는 것이지 그 내부에서의 실목적에도 알맞은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칸트가 그의 저서에서 의무에 알맞은 행위와 의무에 따르는 행동의 구분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윤리성에 대한 판단에 존재하는 주체성과 객체성에 따라 수용적 측면에서의 포괄적 윤리가 진정한 윤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터 싱어는 선호 공리주의에 따라 과시적 원조를 하는 것도 결과주의적 관점에 따라 긍정적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에 있어 자신의 재산을 과시하기 위해 원조를 하는 것은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 윤리적인 행위와는 동떨어져있다. 주체적인 윤리성은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흄은 선함과 악함이 공감의 원리 따라 마음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공감에 따라 선함과 악함이 결정될 수 있는 이유는 마음 속에서의 판단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자신이나 타자에 대해 예술적 공간의 성장 파괴, 혹은 멈춤 및 수축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것이 폭력이며 비의도적이지만 폭력에 일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무지의 악함이며 의도적으로 자신이나 타자에 대해 예술적 공간의 성장, 죽음으로의 선구, 발전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것의 바탕이 화해이며 이를 진정으로 달성하기 위해 영감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무지에서 합치되는 선한 행동은 진정한 선한 행동이 아니며 예술적 추동이나 영감을 바탕으로 행하는 신념있는 행위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만들고자 해서 행위한 결과가 의자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의자를 만드는 사람으로 불려야 하는가, 배를 만들다가 실패한 사람으로 불려야 하는가? 의지의 선악을 판단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의 예술적 본성과 배치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피터 싱어가 과시적 원조를 긍정한 이유는 오로지 실천적인 영역에서만, 수용자적 측면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과시적 원조에 대한 조건 부분을 더 자세히 해보도록 하겠다. 과시적 원조는 자신의 재산을 과시하기 위해 원조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과시할 방법 중 영감을 바탕으로, 가장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서 원조를 한 것이라면 선함이 어느정도 함유되어있을 수 있지만 “선한 사람”이라는 타이틀까지 얻기 위해서라면 그때는 선함을 전혀 함유하고 있지 않은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와 정치체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에 주목하였고 그러한 비판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체제로 가기 위한 혁명과 같은 것들이 긍정될 수는 없다. 실천적인 면에서의 극단적인 예시에서 꼭 반드시 어느 세계가 파괴된어야 한다면 세계의 성숙도와 양을 계산하여 공리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폭력을 결정해야 하지만 이론적인 면에서와 실천적 면의 이상적인 선한 단초에서 비롯되어 내리는 명령에 따르는 행위에 관해서는 폭력이 반대되고 어떤 이득에도 흔들리지 않음을 지시하며 예술 세계의 불가침적 성질을 보호해야 됨을 드러내기에 의도적인 혁명은 점진적 혹은 급진적 개혁으로 변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은 존 롤스의 시민 불복종과 같거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어느정도 부정의한 법도 지켜야 되는, 비폭력적이고 공개적이고 우리에게 모두 주어진 이성에서 비롯된 공적 정의관에 따르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시민 불복종의 원칙에 따라 폭력은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맹자의 역성혁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맹자 이야기가 나왔기에 삶에서 취해야 할 태도(삶에 대한 태도) 부분에서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감사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사랑과 감사는 다른 층위에서 작용한다. 마치 화해와 영감처럼 서로 다르지만 그들의 명확한 바운더리를 가지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사랑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의 태도이자 발생하는 감정이라면 감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존경이자 이성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사랑을 사랑답게 하는 능력이다. 감사함은 사랑할 수 있는 과정 속에서 필요한 이성적 능력에 대한 감사이자, 법칙의 명료성과 존경받을만한 인격성의 빛에 대한 감사이다. 공자에서부터 설명된 개념인 인(仁)은 사랑의 본질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이는 주희의 해석으로 성리학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인(仁)의 뜻을 현대에 더 명확히 알고자 했으며 한 연구에서는 인(仁)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1 덕목이자 관계 그 자체를 뜻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하지만 인(仁)은 논어에서 볼 때 꼭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기에 현대적 해석은 맹자를 비롯한 후기 유학을 바탕으로 좁은 범위에서만 얘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仁)은 사랑의 본질 또한 아니다. 인(仁)은 감사이며 사랑을 사랑답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본질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지만 담대함의 기초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인(仁)이 감사라고 해석될 수 있는 이유는 유교와 도가가 같은 도(道 -> 세상의 진리, 세계의 운행 법칙)를 상정하는데 유교는 실천적 측면에서 도와 도의 활용에 대해 탐구한다면 도가는 도의 근원과 그에 따라 사는 삶에 대해 근본적 측면에서 탐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는 근원적 도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바탕으로 실천적 측면을 전개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는 인(仁)이 담대한, 인(仁)에 따른 삶을 지향하는 그 자체로 재귀적인 감사적, 존경적 측면과 도(道)의 간접적 경험을 지향하도록 하는 감사임을 알 수 있다. 감사가 있어야 사랑이 작용할 수 있으며 감사의 존재가 사랑의 근본이 된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통해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역량과 노력을 통해 노동의 본질을 성취하게 해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즐기는 일을 하면서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 기능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산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분배되어서는 안되고 자본에 삶의 목표를 두게 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전자가 후자보다 중요하지만 미시적으로 개인에 주목한다면 후자가 전자보다 중요하다. 전자는 국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면 후자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는 개개인의 종합이기에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이상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후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옳다.

왈처는 복합 평등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저서를 보면 복합평등이란 “한 영역 안에서 혹은 어떤 사회적 가치와 관련하여 한 시민이 지닌 어떠한 위치도 다른 영역 혹은 다른 가치와 관련된 그의 지위 때문에 침해당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라고 서술 되어있다. 결국 이는 자산이 지배적 가치가 되어서는 안되며 이러한 지배적 가치로 인해 다른 가치들이 분배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배에는 그 이전에 숨어있는 자본의 막대한 영향에 대해 사고해봐야 할 필요성이 감춰져 있다.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 더 넓은 사람을 만나고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까지도 자본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큰 특징이다.

악순환에서의 자본주의는 하나의 등급제이자, 자본의 우월적 상징이 부각된 이상으로 다가온다. 또한 높은 등급으로 가고 싶어하는 열망(완전해지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상에 대한 열망)과 소외되고 싶지 않아하는 친밀성에 대한 욕구, 집단에 대한 욕구가 결합되어 자본적 갈등의 주 원인이 되어진다. 또한 사고가 자본에 결부되며 효율로 포장한 비효율적 삶이 탄생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이 지배적 가치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라도 다른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의 자본의 가치를 낮게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정치 권력이라는 가치가 부여되는 하나의 직업 집단이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적은 임금을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직업 쏠림을 해결할 수도 있으며 사회적 자본의 쏠림 현상 또한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 멘토링 관계 맺기와 정부 지원과 규제를 통한 중소기업 성장을 촉진하는 정책도 중요할 것이다.

여기서 사고가 자본에 결부된다는 것은 앞에서 목적에 합치하기만 하는 것을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설파하는 것과 같다. 선호 공리주의는 실천적 영역에서만 실천 이성의 명령에 따라 허가를 받은 이후에 선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선하다고 부를 수 없음에도 선하다고 주장하는 무논리와 같다는 말이다. 자본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과정과 결과를 구분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본의 노예 상태에 놓여있도록 스스로를 부추긴다. 이는 자본주의의 왜곡성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서술한 것이고 이러한 개인의 왜곡된 관점이 결국 사회적으로 자본이 막대한 영향과 힘을 지니게끔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이 점에서 우리는 자본에 삶의 목표를 두게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사회와 개인은 소통하는 것이기에 사회는 개인의 종합으로 이뤄지지만 그 후세대와 구성원에게 다시 그 가치관을 심는다. 그렇기에 뿌리뽑지 않는 이상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본에 삶의 목표를 두지 않음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도록 하는 교육, 사회적 자본의 분배 구조의 변혁 등을 동시에 그러면서도 확실히 추구해나간다면 어느정도의 변화는 가능할 것이다.

결국 악순환적 자본주의가 상정해놓는 상징적 이상의 실체를 밝혀야 하며 이를 초월하는 가치의 재설정이 중요하다. 자본주의는 자본에 가치를 둘 때 등급이 있어보이지만 사실 등급이 있지 않다. 오히려 높은 등급으로 보여지는 사람들이 더 낮은 등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필요한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근로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부르주아도 존재할 수 없다. 사회는 하나의 관계로만, 일방향적인 관계로만 이뤄져있지 않다. 또한 일방향적이지도 않다. 근로자 1이 근로자 2를 위해서 일한다고 치자, 그러면 근로자 2는 상사인 근로자 3을 위해 일할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는 근로자들의 총합을 회사라고 할 때 그 회사의 수장은 상사가 없다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그 회사는 소비자를 위해 일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오히려 다른 근로자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중세시대의 신분제에서 하인과 닮아있다. 또한 근로자 1은 근로자 2보다 위에 있을 수도 있다. 다른 회사가 있을 때 근로자 1은 자회사의 것을 사용하지만 근로자 2는 다른 작은 회사의 제품을 사용한다면 근로자 1이 더 많은 사람들의 노동을 구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사람들은 자본의 족쇄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본의 족쇄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본이 아닌 타 가치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선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본의 노예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족쇄가 자본의 노예 상태로 작용하려면 자본의 왜곡된 이상을 열망하고 자본만을 추구하고 자본을 목적화해야 한다.

자본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며, 예술도 아니다. 따라서 자본은 하나의 수단으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자본은 목적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자본화 된 사회에서의 현대 예술이 꼭 우리의 사회를 모방한 것과 같다.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현대 예술의 난해함과 격하된 수준은 감상자로부터 비판을 듣지만 그러한 현대 예술이 대표하는 것이 그들 자신이라는 것은 은폐되어있다. 자본주의의 악순환적인 면이다. 또한 한국의 미술관은 닫힌 공간에서 일방향적으로 그림들을 수용하게 되어있다. 이는 일방향적인 위계성이 미술품과 관람객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이상을 견고하게 하는데에 일조한다. 자본은 언제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서비스직에 대한 경고이다. 서비스라고 불리는 배려와 친절은, 그리고 사람을 우선순위를 따져가며 대하는 실속적 태도는 다른 층위에 있는, 즉 예술성의 층위에서의 가장 빛나는 별인 인격성을 자본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마음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배려와 사랑은 자본에 휘둘리면 안되며 누구에게나 닿아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예술성이 파괴되는, 타인의 예술성을 파괴하는 일이 시행되어서는 안되며 이러한 상황이 자본에 의해 정당화되어서도 안된다. 자본이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에 따라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차등이 주어져서도 안된다. 모두가 접할 수 있도록 학교 교육과정 내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며 자본을 위한, 삶의 목적이 없이 스스로를 오로지 수단으로 사용하기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의 예술성과 빛에 의지하여 빛의 예술성의 목소리와 영감이 시키는 일을 따라야 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할 것이다. 모든 예술적 층위를 최선을 다해, 그 본질에 맞게, 본질이 정해둔 자유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 속에서 목적을 찾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예술도 수단으로만 삼지 않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선한 것, 옳음이라고 표상되는 것들이 예술이 허용한 예술의 불가침적 자유의 공간 한계와 그 공간의 밀도와 정도를 정한다.

예술 공간의 밀도와 정도는 어떻게 정해지는지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밀도가 세밀할수록 정도가 깊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예술 공간의 밀도와 정도는 인격성의 빛깔과 색을 깊이있게 하는 것으로 경험과 이성이라는 두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직접 경험은 스스로의 경험 그 자체를 얘기하며, 간접 경험은 이성과 경험이 결합되어 발생하는 이성적인 경험의 재구성이다. 이때 간접 경험은 영감의 재료가 되며 영감이 경험에 후행하지만 인식에 선행한다는 이유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영감(inspiration)은 경험들의 connection에서의 새싹이자 예술의 탄생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간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경험의 동일성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을 더욱 깊어지게 하며 씨실과 날실을 이루어 그 미래를 직조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히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그가 경험해왔던 여러 예술적 공간들의 세부적 요인들을 다르게 꾸며주며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세계를 통해 동일한 경험이 감정과 이성의 수식을 받아 총체적인 자신 삶(자기의 예술 세계)의 지평과 풍성함, 밀도를 가른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들어있던 사람들의 말을 더욱 이해하게 되는 것이며 그때의 선택과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함에 알맞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의 정체되어있는 사람의 말과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한 예술 공간의 밀도와 정도는 견문의 확장과 관련되어있다. 학습을 할 때 정체된 공간에서 계속하기 보다는 환경의 변화를 통해 다시 학습의 동기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이 환경의 변화와 같은 감각으로 인지되는 것들이 감각되어진 후 이성에 의해 가공될 때 예술 공간은 성장하고자 하는 자연적 욕구에 따라 생동적으로 움직이고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정치체이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자유가 왜 가장 중요한 것일까? 예술 공간이 불가침적인 몰가치적 공간 혹은 가장 사적 가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 공간의 특징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서의 모나드와 비슷하다. 모나드의 주름 개념처럼 예술 공간들의 겹침이 가능하지만 그 상태로 서로 간섭한 것은 아니되 모나드 밖과 안으로는 정보 교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고 볼만한 것은 모든 것들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모나드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예술 공간은 전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튼 이러한 예술 공간의 특성에 의해 그 안에서의 자유는 본질적인 것이며 인간 본성에서 근원하는 것이고 사회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며 이러한 존중도 당연히 자연스러운 본성에 속한다. 하지만 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 복종은 옳지 않다. 미국 학파의 영향을 받은 한국은 휴전 상태라는 요인까지 겹쳐져 자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지향을 보여줄 때가 많다. 하지만 온건적 사회주의인 유럽의 국가들을 보았을 때 자유주의와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진정한 공산 상태의 간극을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함을 알 수 있다.

국가는 만들어졌을까? 원래 존재했을까? 국가는 시민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꼭 필요한, 본성에 따라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그 국가가 단일로 힘을 모아서 사람들의 계급을 나누는 그런 상태는 아니다. 루소는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1차 자연상태와 2차 자연상태를 구분하였는데, 1차 자연상태에서는 인간에게 계급도 사유재산도 없지만 2차 자연상태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생기며 비도덕적 행위가 자행되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적 시민 사회를 건립했다고 주장한다. 나도 이러한 관점에 근거하여 시민 사회의 건립은 자연적 본성에 따른 것이지만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하겠다. 더 많은 부분을 탐구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는 얘기하고 싶다.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평등과 자유라는 가치는 서로 대립되어 완벽한 평등과 완벽한 자유를 어떠한 점에서도 만족시키지 못해 오히려 더 안좋은 영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는 하나의 가치가 너무나 힘이 세기 때문이다. 누구나 바라는 하나의 가치는 있는데, 사회 속에서 이러한 가치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평등하다고 느끼진 않으며 정부가 자유롭게 이를 성취할 수 있게끔 제도를 실시하면 그 대상자가 아닌 집단에서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민주주의에서 발생하는 민주주의적 질투이다. 민주주의적 질투에서는 반응적 층위에서의 평등과 모든 것에 대한 자유가 진리라고 현혹시키며 그 안에서의 경쟁 논리라는 모순적 작용을 통해 인간 본질의 예술적 추동을 가리고 모두가 잘사는 것이 아닌 모두가 못사는 것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마치 소피스트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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