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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Nov 21. 2021

길 잃은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잠깐 숨만 고를 수 있어도 좋으니

어느 지친 날 문득 집이 생각나 돌아가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에 머무를 수 있을까.


그립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건 비단 집뿐만이 아니다. 최근까지 아빠와 자주 가던 곳이 있었다. 바로 어릴 적 고향이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리.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장소 중에서 가장 따뜻했고 포근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동생과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뛰어놀거나 기찻길 터널에서 후레쉬를 켜고 나름의 탐험(?)을 했고, 주말마다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오는 이동식 도서관 차량에서 엄마와 함께 동화책을 읽었으며, 한강공원에서 아빠와 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곤 했다. 그곳의 추억들은 내가 앞으로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언제나 내 마음이 지향하는 이상향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롯데마트가 되었지만, 당시 GS마트 덕소지점 옆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있었다. 그저 평평한 주차장이 아니라 꽤 큰 규모의 구덩이로 움푹 파인 주차장이었다. 그 주차장에는 차가 별로 주차되어 있지 않은 채 광활한 시멘트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내게 묘한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마치 그 공간만큼은 덕소가 아닌 느낌이었다. 하루는 그곳이 쥬라기 공원이 되었고, 하루는 외계 행성이 되기도 했으며, 하루는 우리만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동생과 그곳에서 인라인을 자주 탔던 기억이 난다. 서울로 이사하고 성인이 된 후 다시 방문한 그곳은 생태 공원이 되어 있었다. 생태 공원도 나름대로 잘 꾸며져 있었지만, 더 이상 그곳은 우리만의 쥬라기 공원도 외계 행성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내 친구관계는 대부분 오래가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던 탓도 있었겠지만, 내가 누군가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마음의 기준이 꽤 높았던 것 같다. 몇 년간 친하게 지냈던 친구라도 내가 느끼기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과감하게 거리를 두곤 했다. 함께한 추억이 아무리 좋았을지라도. 내 학창 시절의 모든 낭만은 곧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었지만, 그들의 성향이 내 성장에 방해가 된다면 난 그 모든 낭만들을 외면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지향하며 주변의 소중함을 외면하던 내 모습이 문득 아버지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를 단단히 지키고자 당신의 행복과 가정의 추억을 외면하고 일에만 몰두하신 아버지를 한때 치기 어린 마음으로 증오했었는데, 나 역시 아버지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청소년기를 거슬러 내려가 내 유년기를 회상해본다. 난 언제나 내가 아이로 남아 있을 줄 알았다. 평생 어른들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줄 알았고, 실제로 마치 그럴 것처럼 행동했던 것 같다. 언제나 머무를 곳이 있었던 덕분에. 하지만 어느새 아이였던 시절은 끝나 있었고 난 더 이상 내가 머물렀던 곳에 있지 않았다. 난 울타리 밖으로 나와 멀리 걸었고 누구도 날 보호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지금의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평생 아이로 살아갈 거라 착각했던 것처럼. 더 이상 아이가 아니고 나서야 유년기의 소멸을 깨달았던 것처럼, 평생 젊을 거란 착각에 빠져 있다. 그래,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언제나 머무를 수 있는 그런 낙원 같은 곳은 없다.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세월은 영원하지 않다. 우정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를 갈라놓는 백만 가지 이유들로 인해. 고향의 따뜻함도 어쩌면, 영원하지 않다. 부모님의 사랑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모든 것들이 언젠가 내 곁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의 난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목표하는 이상향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게 된다면, 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현재에 만족하면 되지 않느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다. 암막에 가리워진 이상을 좇지 말고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누군가는 따끔하게 가르칠 수도 있겠다. 동의한다. 확실한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니.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다 보면 숨겨진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우리를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구축한 문화와 사회 구조에 매달려서 우리가 만든 순환을 따라 흘러간다. 그 순환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예측한 미래는 대체로 암울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현재에 집중할 수가 없다. 현재에 만족할 수가 없다. 내 앞에 주어진 길은 어둡고, 그동안 기대고 살아왔던 이상향 또한 사라지고 있으니까.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꿈은 아닐 것이다. 꿈은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꿈에는, 운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 자격이 충분하다. 그 정도로 소중히 여기고 싶다. 운명 정도는 되어야 꿈 앞에서 우유부단하게 고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꿈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꿈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게 있다. 바로 검은 화면이다. 우리가 갈망하지만 쉬이 보지 못하는 꿈, 그 억압된 욕구를 TV와 스마트폰은 해소시켜준다. 대리 충족이라 불러야 할까. 검은 화면이 보여주는 무한한 자극적인 영상들은 우리를 강제로 ‘지금, 여기’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아무 생각도 못하게 한 채로. 검은 화면은 ‘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우리는 검은 화면의 요구에 기꺼이 응한다. 가뜩이나 잘 보이지 않는 소중한 꿈의 형태들은 그렇게 페이드 아웃 된다.


길 잃은 우리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면, 그걸 깨닫는 순간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미지를 향한 모험에 온 몸을 내던질 수 있는 기회. 담대하게 꿈에 모든 것을 걸어볼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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