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정의 내리는 일

맥베스와 마녀

by 이브와 아담
너는 어떤 사람이야?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문장, 단어, 색깔을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중도의 가치를 지키길 원했지만, 때로는 한없이 극단적이길 원했다. 내 자취를 감추는 검은색을 좋아했지만, 때로는 자극적인 빨간색을 좋아하기도 했다. 아무 근심이 없는 흰색이 좋을 때도 있었다. 기계처럼 냉철하길 원했지만 가끔은 한없이 인간적이고 싶었다. 언제나 평정심의 다리에서 균형을 유지하길 바랐지만 때로는 감정의 바다에 온몸을 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다. 들쑥날쑥한 상태 그래프에서 내 지점이 여기라고 콕 집어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난 울타리 안에 있는 상황이 싫었다. 누군가의 걱정이 때로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가 뭘 할 줄 아는지 혹은 할 줄 모르는지 다른 사람이 정의 내리는 일, 카리스마 없어서 장교는 할 수 있겠냐는 말, 자신의 주장이 정답이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말 등등. 명확한 지침은 좋은 법이지만 그게 유일한 방법으로 자리 잡는 게 싫었다. 시야를 넓히고 싶었다. 조금은 빙빙 돌아서 갈지라도. 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는 말이 있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4명 중 한 명인 맥베스가 이에 대표되는 인물이라고 하는데, 누군가 자신의 미래를 예지 해주면 제아무리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더라도 결국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한다.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대로 왕이 되고, 마녀의 예언대로 충신을 의심해 살인하고, 마녀의 예언대로 아내를 죽이고, 자신의 왕국과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간다. 그러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정의 내려지는 단 하나의 문장은, 가볍게 생각할만한 우연을 운명적 저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나 역시 나를 정의내리는 그런 말들이 내 길을 결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 말들이 내 마음속에 비집고 들어와, 손 닿지 못할 곳에 영영 살아남지 않았으면 했다.


대학교 교양수업 시간에 MBTI 검사(심리유형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지나가다 내 MBTI를 스윽 보신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너, 여지 남기기를 좋아하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던 교수님의 말씀. 너 같은 성격은 뭔가가 정의 내려지거나 결론 지어지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야, 맞지? 선택을 유보하고 뭐든 걸 가능성으로 남겨두고 싶어 하지.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말씀도 하셨던 것 같다. 아마 사는 게 피곤할 거라고. 하지만 그런 특성이 때로는 내게 잠재력으로 다가올 거라고.


너는 어떤 사람이야? 나는 내가 누군지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선택’이 내가 규정짓는 유일한 무엇이라면, 수많은 내 모습 중 단 하나만 선택하는 것은 다른 나머지의 나를 부정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정해진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규정된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이건 신념이 없는 나의 유일한 신념이었다. 오늘날의 법칙과 이상이 때로는 얼마나 가치가 없는지 역설하는 소설 데미안이 내게 꽤 영향을 미쳤을지도. 꽤 위험한 생각이라는 걸 안다. 때로는 이 생각이 날 크게 엇나가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나보고 피곤하게 살 거란 교수님 말씀의 의미를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금지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때로는 날 집어삼킬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날 정의 내리는 어떤 말들을 수긍하고 어떤 말들을 떨쳐버릴 것인가. 과연 이 선택에 기준이란 건 존재하는 걸까.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하면 되는 걸까. 날 긍정적으로 여기는 말은 받아들이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말은 배척하면 되는 걸까. 하지만 날 성장시키는 건 회초리같은 말들이다. 비판 속에 비난이 조금 섞여 있더라도. 그 말들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에는 두려움과 반가움이 공존한다.


길을 걷는다. 여러 갈래길이 펼쳐져 있다. 내 앞에 맥베스의 마녀가 나타나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킨다. 길은 사뭇 평탄해 보인다. 마녀가 말한다. 주어진 길을 따라 여느 누구처럼 평범하게 걸어왔으니, 내가 갈 만한 길은 이곳밖에 없다고. 나는 다른 길들을 본다. 내가 선택하지 못할 그 길들을. 경사가 가파르고,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위태로운 그 길들을. 하지만 그 길들 위로 별이 보인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그 길들을 가리킬 것을 안다. 또 어느 무수한 말과 예언이라는 것들이 날 가로막으려 하겠지. 하지만 언제든 넘으려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마음속에 두려움이 피어오르면 생각할 것이다. 내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결정짓지 못한 모든 두려움 속에는 꿈이 깃들어 있다고. 스스로를 정의 내리는 일은 내 역할이 아니라 삶의 역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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