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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정원 May 06. 2024

빨간 장미 수난기

4월 이야기

어느덧 4월은 마무리를 향해갔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모란꽃이 어찌나 꽃이 큰 지 거인 꽃처럼 멀리서도 눈길을 잡아챘다. 연두색 불두화의 꽃망울이 탐스럽게 눈송이를 부풀렸고, 하늘을 향해 한껏 고개를 치든 장미 꽃봉이 다가올 5월의 장미 축제를 예고했다. 봄비 한 번 시원하게 오면 초록 잎사귀들이 어찌나 쏟아지던지 정원은 하루 만에 녹음을 되찾은 듯했다. 앙상한 가지의 나무와 맨 흙을 드러낸 어린 정원에서부터 우람하고 굵은 가지를 숨기지 못하는 오랜 정원까지 4월 말의 마을 산책은 냉동시켜 둔 지난 정원의 기억을 다시 만난 것과 같은 반가움이 가득했다.

탐스러운 봄 꽃

너무 바쁘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정원에 나가 물을 준다. 틈틈이 장미, 일년초, 수국을 흙꽂이했다. 정신없이 나가다 보니 잠옷채로 정원일을 하고 그 옷 입고 잘 수도 있다며 남편이 싫어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그늘에 심어둔 빨간 장미의 쪼그라든 줄기와 잔뜩 쳐진 거미줄을 생각하고 있었다. 양지에 심은 분홍 장미는 쑥쑥 자라고 있는데, 그늘에 심은 빨간 장미는 심은 지 3주가 지난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음지에서는 아무리 수세 좋은 빨간 장미도 안 되는구나를 깨닫고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느니 양지바른 야치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재활용 쓰레기 몇 가지를 들고 정원으로 나가 이 차전을 시작했다. 빨간 장미를 휀스에 묶은 끈을 풀고 빨간 장미의 뿌리를 삽으로 퍼서 남향 아치로 옮겼다. 반대편 아치에 심은 분홍 장미에는 벌써 꽃봉이 서너 개 보였다. 작년에 가을에 심은 땅장미보다도 빨랐다. 장미에게 태양의 힘이 이렇게 강력했다. 빨간 장미의 쪼글 해진 줄기와 시들한 잎사귀가 안타깝지만 새 남향 자리에서 부디 회생하기를 바라며 거미줄과 시든 잎을 떼내고 물을 잔뜩 줬다.  

남향 아치로 자리를 옮긴 빨간 장미

 빨간 장미를 심었다가 2주 만에 철수한 담장 앞 어둠의 공간에 나무가 있었으면 했다. 큰 나무가 없으니 꽃도 없고 정원이 시시하고 휑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모처럼 주말 오후에 여유시간이 생겨서 처음으로 나무시장에 들렀다. 화원 가는 것도 이제 적응 됐는데, 나무 시장이라니 내가 진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나무 시장에는 다양한 침엽수가 줄 지어 서있고, 매대에는 수입한 수국들이 종류별로 늘어서 있었다. 도시에서 울타리목으로 쓰는 나무를 주로 파는 곳 같았다. 4월 중순이지만 한낮은 한여름이었다. 처음으로 반팔을 입고 차 에어컨을 틀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갔다. 후끈한 더위에 땀을 흘리며 분갈이를 하시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나는 아주머니께 그늘에서 잘 자라는 나무가 뭐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남천을 추천하셨다. 겨울에는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다는 남천은 동네에서 많이 봐서 익숙했다. 큰 꽃나무는 구하지 못하고 작은 남천 5개를 사서 화원으로 향했다. 몇 주전에 한번 온 탓인지 크게 마음이 동하는 식물은 없었다. 로즈마리를 휘어지는 종으로 줄기가 굵은 사이즈로 하나 사고, 색이 특이한 버베나를 두 포트 사고, 그늘 진 곳에 심어볼 식물을 테스트하려고 고사리와 모스를 샀다. 일년초를 여기저기 심었다.

남천과 꽃들

큰 나무를 사지 못한 게 아쉬웠다. 또 다른 나무 시장으로 다시 가야 할 듯하다. 일단 사온 식물을 심고, 정원에 있는 식물을 늘려서 정원을 채우는 것이 먼저 인 것 같다. 그래도 어떤 나무를 구할지 미리 정해놓기 위해 마을을 걸어 다니며 이웃집 정원의 나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키도 크고 한 번에 어마어마한 꽃을 선물하는 꽃나무가 제격이었다. 벚꽃 한철이 지나고 뒤늦게 피어나 예쁜 꽃을 더 오래 보여주는 분홍 겹벚꽃도 눈에 들어왔고, 비슷하게 생겼지만 귀걸이를 맨 것 같은 분홍 색감의 서부해당화도 후보에 올랐다.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지만 배송 중에 가지가 꺾이는 경우가 많아서 망설이게 되었다. 결국 정원 나무는 쉽사리 구하지 못했다. 나무가 뽑힌 자리는 아직도 빈자리로 남아있다.


몇 주가 지나고 분홍 장미는 꽃봉을 쏟아지고, 꽃봉이 점점 통통해지더니 분홍색으로 물들어갔다. 분홍 장미의 키를 키우기 위해 제일 높은 꽃봉을 뗐는데, 꽃봉을 열어보니 안에 무수히 많은 꽃잎이 들어차 있었다. 맞은편 붉은 장미는 자리를 옮기고 우선 달고 있던 잎을 다 떨궜다. 잎부터 시들어가는 장미의 줄기를 잘랐더니 줄기도 마저 시들어 간다. 그 후로 며칠 잠잠하더니 새 잎이 조금씩 돋기 시작했다. 빨간 장미라 새잎도 붉은빛이 도는 듯했다. 꽃봉도 없고 늦었지만 열심히 작은 손바닥 같은 이파리를 사방으로 펼쳐내고 있다. 작고 작은 잎이 돋아나 점점 커지고 태양을 향해 펼쳐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신기하게도 쪼글쪼글했던 줄기도 펴지고 줄기도 돋아나면서 다시 생명력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액체비료를 꽂아주니 금방 한 통이 비어서 두 통째 꽂았더니 또 비었다. 건너편 분홍 장미에 비해 잎도 적고 꽃봉도 없어서 늦지만 성장세가 아주 좋다. 여러모로 늦었지만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짠하면서도 앞으로가 기대된다. 한낮 식물이지만 장미의 변화가 가슴을 울렸다. 쨍쨍한 곳에 심은 분홍 장미는 별일 없이 컸지만 좋지 않은 환경에 심은 붉은 장미는 병들고 벌레들의 집이 될 뻔했다. 태양 쨍쨍한 곳으로 옮기니 조금 늦었지만 자신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환경이 식물 생장에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살아난 빨간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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