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걷는 길_5. 우리의 자리

by 찐빵

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를 열고 나가보니 비는 그쳐있었다. 밤새 쏟아낸 흔적이 곳곳에 보였지만 양쪽으로 팠던 고랑이 나름 우리의 자리를 지켜줬는지 안전했다. 안으로 구겨넣었던 의자, 테이블, 쓰레기봉투 걸이대 등을 원래 자리에 두고 캠핑 의자에 앉았다. 나는 새벽에 캠핑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기를 불멍만큼 좋아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 시간의 고요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파도는 들어왔다 나갔다 성실히도 반복하고 있었다. 내 거칠어진 마음을 수도 없이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파도를 바라보며 내가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어젯밤, 지호의 떨리는 음성에 묻어나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지호가 축구선수의 길을 선택했다가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나 두려웠다. 부모를 원망하면 어쩌나, 나중에 갈 길 몰라하면 어쩌나, 어른으로서 현실을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호는 아침, 저녁으로 친구들과 축구 연습을 해왔다고 했다. 답답한 마음을 그렇게 풀고 있었다.

감독님들의 러브콜과 부모님의 견고한 벽 사이에서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의 두려움으로 지호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힘껏 공을 차려는 지호를 매번 주춤하게 만들고 있었다. 드넓은 바다를 보며 나중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치면, 갈 곳이 없으면은 내 안에 갇힌 두려움일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길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살포시 와닿았다. 그 꿈은 나의 것이 아니라 지호의 것이라는 생각도.

어제의 전투가 고단했는지 지호는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해변을 걸으며 남편과 통화했다. 지난밤, 지호의 진심을 전하고 이제는 지호가 가는 방향으로 같이 걸어가 줄까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남편은 지호의 이런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주말에 대회가 있을 때 몰래 가서 보고 오기도 하면서 나름의 고민을 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용기내어 지호가 행복한 방향으로 한 발짝 내딛어보기로 했다.

압력밥솥에 밥을 해놓고 어묵국을 끓였다. 집에서 가져온 파에 식용유를 두르고 볶다가 양파, 마늘, 다진 고기를 넣고 익혔다. 가위로 쫑쫑 썬 맛있게 익은 김치를 넣고 막 다 된 밥을 섞었다. 어제 굽고 남은 고기 몇 점도 잘게 썰어 넣었더니 더 맛깔나 보였다. 나는 음식 남기는 것을 싫어해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퓨전 음식을 사랑했다. 때마침 지호가 일어났다.

“아, 맛있는 냄새.”

지호가 오전 해변을 한 바퀴 돌 동안 나는 모짜렐라 치즈를 밥 위에 뿌려 뚜껑을 닫아두었다. 나는 지호가 끈끈하고 고소한 치즈를 좋아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호는 식성이 꼭 나를 닮았다. 그런 지호를 볼 때마다 신기하고 행복했다. 오늘은 길게 연결된 치즈가 지호와 나 사이를 잇는 끈처럼 보였다. 우리 둘은 늘어지는 치즈가 얹어진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시원한 어묵국은 꽤 잘 어울렸다. 파도를 반찬 삼아 가만히 먹으며 그거면 충분한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점심부터 본격적으로 구름이 걷히더니 해가 쨍하니 내비쳤다. 어제의 눅눅함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고 텐트 앞에 죄다 늘어놓았다. 소나무 사이에 건 줄 위에는 수건과 침낭이 살랑댔다. 살랑대는 것들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살랑댔다. 지호도 하나씩 물건을 들어 텐트 밖, 해가 잘 드는 곳으로 옮겨놓았다. 캠핑 의자, 폴딩 테이블, 캠핑 코펠, 화로대도 다 꺼내놓았다. 꼭꼭 숨겨둔 참나무 장작을 두 개씩 쌓아올려 탑도 쌓았다. 두 개의 나무토막이 나란히 거리를 유지하고 씨줄, 날줄처럼 얽어지며 올라갈 때 튼튼한 탑을 쌓을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거였다. 사이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고 햇볕이 가닿을 때 저마다 반짝 빛을 내는 것 같았다. 바짝 마른 텐트를 둘러보면서 우리의 이 시기도 고슬고슬 잘 마를 수 있기를 기도했다.

떠나는 아침 새벽, 다시 파도 앞에 고요히 앉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다 받아주는 바다. 그 모습을 마음에 담고 집으로 돌아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텐트를 지어가던 것과 반대로 작은 것들부터 다시 여며 놓았다. 자충 매트 바람을 빼고 내부 텐트, 외부 텐트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어느새 아빠가 있던 자리에 지호가 있었다. 큰 짐부터 차 안쪽에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그리고는 사이, 사이에 작은 짐을 야무지게 끼워 넣었다. 돗자리, 침낭, 전기매트는 차 위에 있는 거북이 등딱지 같은 케이스에 넣어 고정시켰다. 지호의 떡 벌어진 어깨가 오늘따라 더 커보였다. 내가 어흥 아저씨 온다고 하면 지호가 내 품 안에 쏙 들어왔었다. 그 지호는 나의 기억 속에만 산다는 사실을 다시 알아차렸다. 차 하나에 고슬고슬해진 것들을 다시 담고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리 챗 gpt에 10대 남학생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검색해놓았다. 차 시동을 걸고 현아의 ‘버블 팝’을 틀었다. 가사를 들으며 민망해서 풉! 웃음이 나왔다.

“첨부터 끝까지 날 바꾸려 하지마. 어쩌다 전화 안받으면 어때.

너에게 날 맞추지 마, 나에게 더 바라지마. 있는 그대로 생각해봐. 보이는 대로 날 바라봐줘.”


우리는 반복 설정을 하고 떼창을 부르며 돌아왔다.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서걱함이 시원하게 날아가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하늘은 전보다 더 푸르고 깊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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