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를 생각하면 듬직했다. 다섯 살이 되던 지호는 어릴 때부터 운동감각이 좋았다. 옆집에 사는 일곱 살 형이 두 발 자전거를 연습하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형이 쉬는 동안 지호가 그 자전거를 타고 작은 골목길을 돌아왔다. 작아서 다리가 페달에 닿지도 않았다. 페달 한 바퀴를 다 돌리는 대신 4분의 1바퀴를 짧게 굴려서 우리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의 벅참이 지금도 생생했다. 지호는 어리지만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말했다. 보드게임을 할 때도 전술을 세워서 어른인 나도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지호가 나와 한 몸이었을 때 태명이 ‘지혜’이기도 했다. 지혜롭게 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지혜야, 지혜야” 불렀다. 작은 지혜가 듬직하게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지호를 떠올릴 때 ‘지혜로운 듬직이’라는 별명이 떠올랐다고 했다. 지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든든한 무언가에 충전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요즘 힘든 거 있어?”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질까봐 브이콘을 오독거리며 살짝 물었다. 주춤하던 지호는 망설이는 것 같더니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듬직하던 아들의 모습 대신 어린 시절의 지호가 눈앞에 걸쳐보였다. 지호는 초등학교 내내 장래 희망에 축구선수라고 적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또래 남자아이들이라면 흔하게 적어내는 꿈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책가방 속에는 책 대신 축구화가 들어있는 날이 많았고 축구화는 하루가 다르게 낡아져서 금세 바꿔야 했다. 학교만 끝나면 텀블러 2개에 물을 채워서 밖으로 나갔다. 지호의 얼굴은 한겨울을 빼고는 늘 그을려 있었다. 지호가 크고 작은 축구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거나 어시스트를 몇 개 했다고 이야기할 때 기특했다. 공식적인 풋살 대회, 축구대회에 나가면서 축구 클럽 감독님들이 입단 제의를 해왔다. 처음에는 가볍게 응원하러 갔다가 대회가 끝나면 감독님이 주신 명함이 내 손에 들려있곤 했다. 그 횟수가 늘어갈수록 우리의 시름도 커져갔다. 나는 7~8명이 하는 달리기에서 7등, 8등을 도맡아했다. 남편도 운동을 좋아하긴 했지만 취미로 하는 정도였다. 이런 우리 둘 사이에서 지호는 근심거리가 되었다. 우리가 전혀 가보지 않은 길로 가겠다니.
지호는 축구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했다가 중학교는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가겠다고 말했다. 나와 남편은 주변에서 들었던 사례를 늘어놓았다. 집과 떨어져서 합숙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 매달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 부상의 위험성, 부모님의 지원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 수없이 많은 안되는 이유를 물어 지호 앞에 가져다놓았다. 지호는 우리가 물어온 이야기를 듣고 소화해내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축구 감독님들은 얌전한 아이에게 축구 바람을 넣는 사악한 존재로까지 느껴졌다. 어느 날 지호는 우리 앞에서 펑펑 울었다. 자신을 한 번만 믿어달라고. 나와 남편은 매정하게 안된다고 했다. 축구는 취미로만 하라고 부탁했다. 하고 싶다면 배우는 것, 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지원해주겠다고 달랬다. 유럽축구 가이드북을 사주면서 취미반에서 축구를 하는 것으로 하고 서둘러 매듭을 지었다. 결국 지호를 집 앞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을 시켰다. 그 매듭이 꽁꽁 잘 묶여있기를 바라면서.
지호에게는 축구 단짝 친구 강훈이가 있다. 강훈이는 부모님의 지지를 받으며 축구부로 진학했다. 지호와 강훈이는 주말이면 만나서 축구를 같이 했다. 지호는 강훈이로부터 축구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번 여름, 강훈이네 팀에서 중국으로 한중 교류전을 일주일간 떠난다고 했다. 감독님 추천으로 지호도 함께 가자고 했다. 나와 남편은 지호가 또 한번 흔들릴까봐 걱정했지만 취미로만 하는 거라고 다짐을 받고 마지못해 보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에서 돌아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축구 감독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호가 성격이 조급하지 않고 성실하여 중국에서 친구들과 잘 지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전문적으로 훈련해서 지호를 잘 키워보고 싶다는 익숙한 마무리 전화였다. 나는 계속되는 강펀치에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지호는 축구를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계속되는 입단 제의를 부모님이 막고 있다는 사실에 서운해했다. 한 번만 자기를 믿어달라고도 했다.
“엄마, 난 축구할 때 짜릿해. 살아있는 것 같아. 게임보다도 더 좋아.”
지호는 브이콘을 먹기 위해 봉지 안에 손을 뻗었는데 봉지엔 브이콘이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이 샀는데 다 먹었냐며 짜증을 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화내지는 않았다.
텐트 위를 두드리는 빗줄기가 한층 다정해졌을 때 우리도 이만 눈을 붙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