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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렇다 Jan 14. 2024

상처받을 일을 사랑하라!

사랑하는 일의 종료 혹은 사랑하는 일의 중단.

사랑하는 일에 대한 훼방?

사랑하는 일의 목적이자 혹은 대상이 사람인 사랑하는 일에 일어나는 비극적 종말을 생각한다.


죽음과 이별과 외부제압 등에 의한 ‘사랑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할 때 고통스럽다면, 정말로 고통스럽다면 그 일은 인생에서 필시 해봐야 하는 일일지 모른다. 해보고싶고 해야만해서 어떻게든 해봐야하는 일이란 말.


어떤 일이 종료가 되었는데도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그것은 굳이 그 일이 아니어도 되었단 뜻일 수 있다. 어떤 일이 중단되어도 다른 일로 대체 가능하거나 외부 압박의  방해 자극을 받아도 시큰둥 하다면 어쩌면 그 일은 필연성보다 임시성,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은 소모전이었을 수도 있단 뜻일 수도.


너 아니면 안되고,

굳이 그것이여야만 하며,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일이,

우리가 진정 원하고, 정말 하고 싶고, 급기야 사랑하는 일이란 것.


고통스런 일, 상처받는 일, 죽을 것같은 일에 몰두하란 문장이 당연해진다. 고통스럽기보다 편한 것을, 상처받기보다 무심하길, 죽을 것같기보다 쾌락을 먼저 탐닉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지만.


편리성에는 대체 가능성이 전제하고 무심함에는 소홀함이, 쾌락은 타락이 도사리니 생에 냉소해질 위험성이 농후하다.


사랑하여 고통스럽다면 그 가치 추구는 아무나 이뤄낼 수 없는 귀중한 것이란 반증이며, 사랑하여 상처받는다는 것은 그 목적이자 대상으로부터 함께 생의 최선의 의미와 경지에 다다르고 싶단 증거이며 죽을만큼 어렵다는 것은 그것이 내 생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의미란 것.


가장 좋고 제일 행복한 것에 대한 열망은 있으나 그것이 확실치 않을 때는 삶의 고통스런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쉽게 상처 받을 일은 무엇이며 죽을만큼 끝내기 싫은 일은 무엇인가?


부모에겐 자식의 죽음을 상상하는 일부터가 고통이다. 사회집단에서 가족과 친구의 불신과 배신은 분명 상처이다. 인간 삶의 죽음은 죽을만큼에 버금가는, 죽기 싫은 죽음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게 자명한 삶의 목적이 된다. 가족과 친구의 관계에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이유이고, 내 몸과 마음의 건강과 지속을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일의 시작이자 토대이다.


즐거운 것과 좋은 사람과 행복해지는 일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질수밖에 없다. 선택하고 결정할 것이 분명해지고 그 대상에 집중하고 노력하게 되며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취사 선별이 가능해져 에너지 소모를 줄이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찾아오는 고통은 이미 인간의 능력이나 의지 너머의 일이다. 신이 있다면 신의 존재 영역이 될테고 운명이 맞다면 운명의 주관일테고 그것도 아니라면 자연과 시간의 흐름때문일테니 상처받을 일을 사랑하라는 문장을 쓴 이유.


고통받을 사람을 사랑하라!

그 사람이 떠난 삶은 도저히 생각조차 못하겠는.


상처받을 일을 사랑하라!

사랑하지 않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다 싫은 일.


죽을만큼 하라!

할수없을만큼 정성과 노력을 쏟아붓도록.


그것이 내 몸과 마음을 살릴 것이며 충분히, 제대로 살았다는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며, 할만큼 다했으니 나머지, 그 뒤부터는 겸허히 시간의 영역에 맡겨도 될테니 말이다.

흘러가는 생에서 소중하다는 의미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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