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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맛있는독서 Dec 12. 2023

15. 번개 같은,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_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경희 옮김

  

아니! 맹세는 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을 만나 기쁘긴 하지만 오늘 밤 이런 사랑의 서약은 기쁘지 않아요. 이건 너무 성급하고, 너무 무모하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번개가 치네!’라고 말할 새도 없이 사라지는 번개 같아요. 사랑하는 이여, 안녕히 가세요! 이 사랑의 꽃봉오리는 만물을 무르익게 하는 여름의 숨결을 받아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거예요. 안녕히, 안녕히 가세요! 제 마음과 마찬가지로 당신 마음에도 달콤한 안식과 휴식이 깃들기를!

(p59)     



 이탈리아 베로나 공국을 배경으로 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유문화사), 2016>을 읽어 보셨나요?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줄리엣'은 셰익스피어가 남긴 <맥베스>와 <햄릿>의 다른 주인공과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멕베스>의 레이디 맥베스 그리고 <햄릿>의 오필리어는 남자 주인공에 비해 비중은 매우 적지만 그녀들과의 관계는 극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레이디 맥베스는 목적을 위해 남편을 다그치며 몰아쳤고 오필리어는 절망했지만, 줄리엣은 로미오와의 관계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설득합니다. 관계에 있어서 상대를 조정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감정(또는 욕망)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방향을 찾기 위해 행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 편의 극 속에서 가장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가장 어린 줄리엣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줄리엣의 대사 “오,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p.54)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줄리엣의 캐풀렛과 로미오의 몬터규 집안은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 두 사람에게 각자의 성은 저주와도 같은 족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각자의 정체성을 인지한다는 것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각자의 집안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짧은 만남으로 사랑에 빠진 줄리엣은 “무엇이 몬터규란 말이죠? 손도 아니고, 발도 아니고, 팔도 얼굴도, 남자의 신체 다른 어떤 부위도 아니잖아요. 아, 제발 다른 이름이 되어 주세요. 이름에 뭐가 들어 있단 거죠?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그 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똑같이 향기로울 거예요. 그러니 로미오는 로미오라 부르지 않는다 해도 그 이름과 상관없이 그분이 지닌 저 고귀한 완전무결함을 그대로 간직할 거라고요. 로미오, 당신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당신의 어떤 부분과 상관없는 당신 이름 대신 저를 송두리째 가져가세요.”(p.55)라고 확인하지 못한 로미오의 마음에 대한 불안감과 안타까움을 드러냅니다.


 기록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존에 있었던 희곡의 다양한 내용을 자신의 방식으로 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를 증오하며 대립하는 두 가문, 두 가문의 사랑스러운 남녀, 비밀 결혼이라든가 가짜 죽음, 그리고 비극적 결말과 두 가문의 화해와 같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기본 축이 되는 사건들은 기존에 있던 희곡들에 등장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준 전작들보다 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고 있을까요? 아마도 셰익스피어만이 가진 시적 언어의 표현(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영어로 표현되는 그 맛을 살려내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과 누가, 언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다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매우 보편적인 정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느 시대, 누가 읽어도 주인공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야기의 기본 축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을 입체적인 인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역할 또한 생동감이 넘칩니다. 즉,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단지 두 주인공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두 가문의 부부, 줄리엣의 유모, 로미오의 시종, 로런스 신부와 영주 등 두 가문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이나 생각을 다양하게 등장시키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합니다. 아마도 셰익스피어는 상대에 관한 관심과 이해가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정작 희곡을 제대로 읽은 독자들은 생각보다 적은 것 같습니다. 그림책, 만화책, 뮤지컬,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반복되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 원문에서는 대사가 신분에 따라 변하는 시적 표현이라든가 평민들이 사용하는 유쾌하고 짓궂은 말장난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한글 번역본은 그 맛을 살리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의 정서를 충분히 느낄 수 있고 그 대화 속에 담긴 숨겨진 뜻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들어보기만 한 독자라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천천히 즐기면서 대사 속의 색다른 맛을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런 격렬한 기쁨엔 종말이 있게 마련이라네. 불과 화약이 닿자마자 폭발하듯이 승리는 절정에서 숨을 거두는 법. 지나치게 단 꿀은 도리어 달기 때문에 싫어지고, 맛을 보면 입맛을 버리게 마련이지. 그러니 사랑은 적당히 해야 해. 오래가는 사랑은 그런 거라네. 서두르면 느리게 가는 것보다 오히려 더딘 법이지.(p.84)



(그래. 살아간다는 게 그렇기도 하지......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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