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버릇처럼 하는 말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점점 봄, 가을이 짧아지는 것 같아.이다
내 기준에서 해석하자면
좋은 건 언제나 스치듯 지나고 아쉽기 마련이다.
한 달 스케줄이 나올 때가 되면 결국은 거기서 거기, 그게 그거일 텐데도 난 늘 뜯지 않은 편지봉투를 손에 쥔 것처럼 설레어했다.
그 한 달 스케줄이 한 달이라는 시간의, 공간의 밑그림이었기 때문이다.
10시간을 꼬박 날아가는 장거리가 3개 정도 나오거나 주말 비행이 많거나 새벽 비행이 잦으면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도 나의 사생활도 늦잠에서 여유를 부리는 특이한 취미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얼마나 포기해야 할까 아님 얼마나 갖출 수 있을까 손끝으로 만져보며 가늠해보는 그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소중하기도 조금은 겁이 나기도 했던 것 같다.
가끔은 정말 일하고 싶었고 가끔은 비행을 여행으로 생각하며 즐길 힘을 냈고 가끔은 그냥 도망가고 싶을 만큼 끔찍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너무 좋아도 그냥 그런 척, 너무 싫어도 그냥 그런 척.
그렇게 보낸 나의 20대, 30대. 정말 쏜살같이 흘러갔다.
중요한 데이트를 지킬 수 없거나 소중한 사람의 특별한 날에 함께할 수 없어도 늘 한결같아야 하고 감정을 모나지 않게 잘 조율하고 다스려 누군가의 안전을, 행복한 시간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가장 싫은 말이 ‘여행 자주 다녀 좋겠다’ ‘부럽다’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 몫을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벼운 발언에 감정 소모를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땐 그 말이 그렇게 싫어 듣기를 거부했다. 좀 무게를 실어 '물론 힘든 점도 있겠지만..', '쉬운 일은 없겠지만..', '늘 좋지만은 않겠지만,,’ 뭐 이런 조심스러움을 표현했다면 좀 덜했을까 그 마음이?..
돌이켜보면 또 참 별거 아닌 일에 울컥했네 싶기도 하지만.
임신과 출산과 육아. 이 떼려야 뗄 수 없는 끈끈 단단한 삼각 구조는 자연스럽게, 무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한국에 눌러앉게 만들었다.
계절이 주는 정직한 변화와 기쁨을 느낄 겨를 없이 뒤죽박죽인 기후 속에 살았기에 두어 달 고스란히 다가온 이번 가을은 정말 그 의미가 컸다.
아기들 덕분에 주말마다 틈틈이 공원엘 나가고 매일 등원, 하원을 시키고, 유니폼이 아니라 가을에 꼭 맞는 의상까지 신경 쓰다 보니 가을의 존재 이유 그 의도 충분히 받아들일 여유가 있는 요즘이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이렇게 좋은 거였어? 정말 이 정도로?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내가 너무 웃겼다.
한 가을을 지내면서 이렇게 자주 좋았던 건 아마 내 평생 처음이어서 그랬나 보다.. 했다.
덧붙이자면, 뉴욕의 센트럴 파크, 파리의 뤽상부르 가든, 독일 여러 소도시의 가을.. 긴 세월 만나왔던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가을보다 한국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듯하다.
한자리에서 매일매일 하루를 이틀을 한달을 차곡차곡 채워 곁에 있다 보니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바이러스로 세상이 떠들썩 해선지 모두 건강하게 본인의 맡은 자리를 잘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공기의 온도를 바람의 속도를 빛의 색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
2020년 가을에게, 내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가을아, 내년엔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
그리고 좀 더 길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