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세상 빛나는 서른의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혼을 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했던 것들을 떠올려봤다. 물론 모든 문제는 '우리'로부터 발생한 것이었겠지만, 외부적 요인이 비교적 높았다고 생각했던, 그러니 누군가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것들. 혹은 부디 사회가 빠르게 변화했으면 좋겠는 것들.
그 첫 이야기는 <2세 계획> 에 관한 내용이다.
5년의 결혼생활 중에
아이가 찾아왔다면,
우리는 아마 잘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우리에게는 2세가 찾아오지 않았고, 20대였던 그리고 나의 업을 사랑하는 나는 구태여 노력을 동반하면서까지 먼저 아이에게 마중까지 나가고 싶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 무렵 나와 이혼을 하게된 전 남편은 삼십 대 중후반의 나이에 들어섰고 그의 여동생인 시누이 가족에게는 아주 아주 예쁜 아이가 생겼다. 그즈음부터 그는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부모를 필요로 하는 많은 아이들을 입양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어떠한 형태의 가족이든 마찬가지로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충분하게 함께 대화하고 싶어 했다.
이를테면 <아기 낳는 만화>를 같이 보자고.
https://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703837
아니면 <케빈에 대하여>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고.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6843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우리의 주 수입원인 내 사업의 MNA에 대해,
또는 나보다 사업성이 훨씬 뛰어난 당신이
이 사업을 인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해보자고.
'아기 낳는 만화'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디테일하게 묘사했고 '케빈에 대하여'에서는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을 낳게 되는, 그렇게 희망하지 않은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는 과정과 비극적 결말을 담았다.
끔찍한 결말이었지만, 내가 이런 만화와 영화를 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러니 이렇게 위험한 면을 너도 인지해라'는 결코 아니었다. 관련된 서적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상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족이라는 존재, 생명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존엄하고 가치 있는지. 그런 가족을 꾸려나가기 위해 우리가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나눠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가 되는 준비 내용을 담은 책도, 만화도, 영화도, 드라마도 켜자마자 방으로 들어가버리거나 10분도 채 보지 않고 잠들어버리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나와 깊은 대화를 피했다. 단순한 피곤함이 아니라 대화에 대한 불응의 표현이었다.
그리고는 늘,
그렇게 모든 걸 준비하고 낳는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되는지 반문했다.
부부싸움을 하면서도 메모장을 켜서 사업 아이템을 적던 그였다. 그는 IMF가 다시 찾아와도 무너지지 않을 준비를 하고 사는 사업가였다. 나는 나무를 보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숲을 봐야 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자연스레 보고 있는건 숲을 넘어선 도시였고 국가였고 우주였다. 호기심 많은 그에게 세상은 너무도 넓었고 재미있는 일은 많았다. 참 넓은 세상에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해오면서 그런 그를 존경했고,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이혼을 할 즈음에서야 그의 머릿속에는 (그 기준으로 이렇게나 소소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여유공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한 평생 그려 왔다는 것.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지, 갖고 싶은 이유에 대해 물어도
'번식은 본능'이라고 설명할 정도로 무심했음에도.
그가 만약 '본인은 이런 성향이기에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 않겠다' 혹은 '너의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라는 정도의 인지만 있었어도 이야기는 또 달랐을 것 같다. 그것도 아니고 그저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라는 논리 안에서 그가 그리는 세상 속 본인은 그렇게 세상을 날아다니는 사람, 그리고 나는 그저 그를 닮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는게 참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결국 안타깝게도 나는
그가 그리는 인생 속
여성상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조를 잘하는, 그림자처럼 묵묵하게 뒷바라지하는, 개인의 '꿈'보다는 '나'라는 인격체보다는 당연히 엄마로서의 삶이 최 우선시되어야 하고, 이 모든 항목은 남편을 비롯 모든 자식들에게 당연하게 적용되는.
그의 엄마 같은 삶.
아이를 너무도 좋아하지만,
그를 사랑했지만,
나는 내 스스로 저런 인생을 택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이의 엄마가 된다면 물론 최선을 다해 성숙한 부모가 되고자 노력했겠지만 그 베이스에는 내가 늘 누군가의 엄마이기 이전에 누군가에게 아주 소중한 딸이고, 누군가의 세상에 하나뿐인 아내, 동생, 사장, 친구라는 사실이 깔려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인정이 없이는 쉬이 내 인생을 모두 내려놓고 싶지 않았고, 나와 함께 배를 탄 이 모두를 지켜내고 싶었고, 나의 업을 사랑하고 일을 하면서 뿌듯함을 느끼고 또 더 큰 꿈을 꾸면서 행복해하고 싶었다. 그에게 엄마라는 존재의 정의가 고작 이렇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그냥 세상 빛나는 서른의 내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응원하거나
침묵하거나
돌이켜보니 결혼을 한 후로 아이 계획에 대한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더라. 그때마다 '아직은 없다. 그러나 3년 후쯤 고민해볼 예정이다' 라며 당연히 이어서 나올 '딩크족이냐'는 두 번째 질문까지 고려한 선답을 습관적으로 날려왔다. 물론 그 뒤로도 '지금은 몰라도 후회한다'를 비롯한 같은 레퍼토리를 늘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이런 질문은 양가 부모님들은 물론 주변의 수많은 불특정 다수에게도 아주 많이 받았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당시 나는 그런 질문들에 대해 내게 비추는 관심이고, 사랑인데 왜 질문을 듣기만 해도 이렇게 기분 좋지 않을까. 늘 고민하며 나의 도덕성에 대해 의심했었다.
서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그 질문은 '말하는 자'가 그저 웃고 있을 뿐
그 모든 질문은 '관심'을 가장한 '무례함'이었다.
나는 이혼하고
시어머니가 보내주셨던
아이가 잘 생기는 한약을 버릴 때
비로소 행복했다.
부부라면,
함께 온 힘을 다해 고민을 나누고,
결정 후에는 성숙한 부모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해 보세요.
부모라면,
당신이 상상했던 길과 조금 다르더라도
만약 틀린 길이 아니라면 자식의 뜻을 응원해주세요.
제3자라면,
부디, 가던 길 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