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고, 힘들고, 그래도 재미있는 일상
한자 줍기 – 최은영 산문집을 완독 했다.
한자가 담은 의미와 잔잔한 문장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춰 작은 것 하나라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선물 받았다.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1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러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도 나는 여전히 나그네처럼 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둘째를 낳고 원하지 않던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 동안 나는 같은 곳에서만 살아왔다.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은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서의 수많은 추억들이 스쳐 지나가곤 한다.
집도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아이들도 어느새 훌쩍 자랐다.
마음속에 멈춰 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점점 희미해져 간다.
요즘 들어 문득,
아, 내가 이제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나이 든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같이 공부하는 60대, 70대 친구들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루를 비유하면, 나는 이제 노을 지는 시간이에요.”
그 말이 왠지 오래 여운에 남았다.
노을 지는 시간에도 멈추지 않고 배우며
자기를 채우려는 그분들의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다.
‘한자 줍기’를 읽으며,
알지 못하는 한자를 보기만 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경험을 했다.
작가님의 고요한 성품이 부러웠고,
사이의 틈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부러웠다.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힘이 부러웠다.
세상에 작가님과 한자만 존재하는 듯한 그 고요한 순간,
사람이 이렇게 좋아하는 일에 풍덩 빠질 수도 있구나,
그걸 온전히 누리는 시간이 있을 수 있구나를 느꼈다.
그렇다고 내 삶이 싫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님의 고요와 대비되는 내 삶이
너무 ‘나’다워서 웃음이 났다.
하루라도 조용할 날 없는 나의 일상.
그래도 나는 이 삶이 재미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간다.
물론 힘들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꾸역꾸역 버틸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통틀어 말하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도 재미지게 살고있다.”
복층 계단을 발바닥으로 스케이트 타듯 내려와 본 사람,
가던 길에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면전에 대고 짖어댄 경험이 있는 사람,
실수했다고 엄마만 찾으며 울던 아이를 향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뛰어나간 순간을 가진 사람,
정신없이 나오느라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은 적 있는 사람,
차는 불에 다 탔는데 집은 멀쩡했던 기묘한 하루를 겪은 사람,
전화로 중국어 수업 예약해 놓고 취소했는지도 모르고 기다려본 사람,
길가에서 주운 달팽이를 키우고 갑자기 텃밭까지 가꾸게 된 사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일상은 그런 일들로 가득하다.
울다가 웃고, 버티다가 살아지고, 힘들어도 재미있는 삶.
p185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未미라는 부정어를 좋아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다가올 미래의 어느 때라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서술어 앞에 未를 붙인다. 아니라고 단호히 부정하는 不불과 달리 희망 쪽으로 기울어진 글자이다. (중략) 쉽게 단정되지 않아야 오래 좋아할 수 있다. 연구자가 쏟아부은 노력이 무색하게, 해석할 여지와 반전의 가능성이 무궁히 생겨나는 未知미지의 대상을 연구하고 싶었다.”
나는 이 문장을 천천히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미지의 나의 미래를
지금 이 자리에서 연구하듯 살아가고 싶다.
내일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