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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러너 May 01. 2024

지금 핸드폰에 당신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나요?

마라톤 대회를 마치고 모처럼 러너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날의 달리기 경험을 나누는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달라진 모습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가 흘렀다. 신체적인 변화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달리기 전보다 적게는 3kg에서 많게는 30kg 이상 살을 뺐다는 사람도 있었다. 크든 작든, 다들 달리기 전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 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두 달 만에 10kg 넘게 빠져서 20대 때 몸매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사람들이 뒷모습을 보고 누구인지 몰라보기도 했다. 살이 갑자기 빠지니까 암이나 큰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는데, 총대를 멘 누군가 용기 내서 물어보길래 요즘 달리기를 한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앞에 앉은 내 또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가장 큰 변화요? 저는 무엇보다도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달리기하는 사람들은 핸드폰이 온통 자기 사진이에요. 지금 다들 전화기를 한번 열어보세요. 제 말이 맞죠?”

 그의 말에 핸드폰에 눈길을 주었다.



잠금화면에 소매 없는 밝은색 옷을 입고 힘차게 달리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사진이 걸려있었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를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엔 제 사진이 없었어요. 애들 사진만 있었죠. 애들 노는 사진, 예쁜 표정 사진. 그냥 애들을 찍은 사진만 가지고 다녔어요. 나이가 드니까 더 사진 찍기가 싫더라고요.”     


 다들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사진은 없고 아이들 사진만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달리기를 하면 달라져요. 핸드폰에 아이들과 남편 사진은 거의 없고 다 자기 사진이에요. 건강하게 땀 흘리며 달리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리며 웃고 있는 사진들로 채워져요. 항상 애들과 남편, 아내만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는 거예요. 누구의 엄마, 아빠가 아니라 달리는 사람, 러너 OOO가 되는 거죠.”     

 그의 말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보았다. 정말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인 사십 대 중반까지 내 사진은 거의 없었다. 온통 아이들과 가족사진뿐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3년 전부터 처음으로 셀카를 찍기 시작하고 달리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참 신기해요. 다들 그렇게 자기 사진을 찍기 좋아하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몰라요. 안 그래요? 어떨 때는 저도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달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다들 그런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그의 말에 다들 공감하듯 크게 웃었다. 사실 나도 예전에는 셀카는 가장 외모가 빛날 때 찍어야 예쁘지 나이가 들어 사진을 찍으면 밉게 나와서 되도록 사진을 찍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튜브에서 40개월 미만 자녀를 둔 젊은 아빠들에게 ‘아동 학습 발달에 미치는 아빠의 역할’이라는 명목으로 찍은 몰래카메라 영상을 보았다.      

 긴장한 표정의 젊은 아빠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는 설문지가 놓여있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펜을 든 아빠들의 손이 빨라진다. 질문이 이어진다.

“아이의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빠들은 얼굴에 웃음을 짓는다.

“당신 차에, 핸드폰에, 책상 위에, 지갑 속에... 아이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나요?”

 아빠들은 신이 난 표정으로 지갑과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센다.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건 언제인가요?”

 아빠들은 사랑하는 아이를 떠올리며 활짝 웃는다.     


 잠시 후 같은 질문에 대상만 바꿔서 다시 설문지가 놓인다. 아이가 아버지로 바뀐다.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건 언제인가요?”

 아빠들의 얼굴이 숙연해지고 미안한 마음에 가만히 눈을 감는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아빠들은 턱을 괴고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최근에 아버지를 안아본 적이 있나요?”

 아빠들은 방안 빈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아버지의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으신가요?”

펜은 더 움직이지 않는다.

“당신 차에, 핸드폰에, 책상 위에, 지갑 속에... 아버지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나요?”

 아빠들은 이제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떨군다.


 고개를 숙인 아빠들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TV가 켜지고 “OOO 아빠입니다.”로 시작하는 자신의 아버지의 목소리. 모든 아버지의 말은 결국 다르지 않았다. 어릴 때 너무 엄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부족한 아빠여서 더 많이 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가정을 이루고 사회인이 된 아빠는 아버지 목소리 앞에 눈물을 보이고 다시 아이가 된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린다. 아버지가 들어와서 어린 시절 아이가 되어 울고 있는 아빠를 가만히 안아준다. 어린 시절 아빠의 사진이 자막처럼 영상에 흐른다.    


 사진 속 아버지는 지금의 아빠이고, 아빠는 아이가 되어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아빠처럼 젊고 멋있는 자세로 서 있고, 아빠는 지금 자신의 아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 방안에 누워 발로 아빠를 비행기 태우며 웃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 아빠와 아이의 노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해서 잊고 지내는 이름,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무심했던 이름, 사랑한다는 말로는 다 채울 수 없는 이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함이 하늘  같은 그 이름. 아버지, 그 이름의 든든함을 배웁니다.”로 영상은 끝이 난다.
 

 나는 아까의 질문을 아버지가 아닌 나 자신으로 다시 대상을 바꿔봤다.

“당신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건 언제인가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최근에 스스로를 안아본 적이 있나요?”

“당신 차에, 핸드폰에, 책상 위에, 지갑 속에... 당신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나요?”      


 하루하루 나를 지우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달리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위의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팀장, 누군가의 아들로 살았다. 주어진 역할과 의무만 말없이 해내면 충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철없는 사치라고 미워했다. 누군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2020년 10월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다. 1km를 쉬지 않고 달렸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달리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겨우 500m정도를 달릴 수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얼마 후, 달리다보니 저 멀리 표지판이 보였다. 이번 주에는 표지판을 목표로 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조금씩 거리를 늘려갔다. 다시 며칠 뒤. 이제는 쉼 없이 표지판까지 달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러닝화가 아닌 딱딱한 운동화에 후줄근한 운동복 바지를 입고 살찐 몸으로 쿵쿵거리며 달리던 중년의 남자. 그게 바로 나였다. 목표했던 곳에 도착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는 큰소리로 세상에 외쳤다.

“그것 봐. 나도 할 수 있다고. 내가 해냈다고!”      

그렇게 시작한 달리기가 벌써 3년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쉬지 않고 100km 울트라 마라톤을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야말로 개과천선이다. 돌아보면 처음의 1km 완주가 나를 100km까지 달리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누군가 지금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건 언제인지 묻는다면 그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순댓국’이고, 최근에 나를 안아본 적이 있는지 묻는다면 ‘모든 순간’ 나를 안아주고 있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당신 차에, 핸드폰에, 책상 위에, 지갑 속에... 당신의 사진이 몇 장이나 있냐고 묻는다면 ‘셀 수 없을 만큼’ 가득하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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